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詩 2020.05.29
작침(鵲沈)/ 이대흠 작침(鵲沈)/ 이대흠 어떤 사람이 떠나고 그 사람이 그립다면 그 사람이 멀리 있다고 생각 마라 그리운 것은 내 안으로 떠나는 것이다 다만 나는 내 속을 보지 못한다 Only For You / Elizabeth Lamott 詩 2020.03.13
극낙강역 / 나희덕 극낙강역 / 나희덕 극락강이라는 역이 있기는 있을까, 광주역이 가까워오면 늘 두리번거렸다 극락강역을 놓쳐버린 시선은 번번이 광주역 광장의 어둠에 부려졌지만 어느날 들판 사이로 흐르는 실낱 같은 물줄기와 근처의 작은 역사를 보았다 역 앞에 서 있는 여자 아이도 보았다 때 절은.. 詩 2019.05.24
나를 지우고 / 오세영 나를 지우고 / 오세영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나를 지운다는 것은 곧 너를 지운다는 것, 밤새 그리움을 살라 먹고 피는 초롱꽃처럼 이슬이.. 詩 2019.05.17
마지막 편지 / 안도현 마지막 편지 / 안도현 내 사는 마을쪽에 쥐 똥 같은 불빛 멀리 가물거리거든 사랑이여 이 밤에도 울지 않으려 애쓰는 내 마음인 줄 알아라 우리가 세상 어느 모퉁이에서 헤어져 남남으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듯 서로 다른 길이 되어 가더라도 어둠은 또 이불이 되어 아픔을 덮고 슬픔도 .. 詩 2019.03.06
모항으로 가는 길 - 안도현 모항으로 가는 길 - 안도현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따윈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 쳐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 詩 2019.02.06
싸락눈 내리는 저녁 / 이시영 싸락눈 내리는 저녁 / 이시영 싸락눈 내리는 저녁, 길을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것 같아 뒤돌아보니 부르는 사람은 없고 그때 막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있지. 누군가 내 생을 다 살아 버렸다는 느낌! 그런 데 그 누군가가 누구이며, 과연 나에게 생 같은 것이 있기 는 있었을까? 잘 구.. 詩 2019.01.08
늦가을 / 김사인 늦가을 /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 詩 2018.12.27
결혼 기차 / 문정희 결혼 기차 / 문정희 어떤 여행도 종점이 있지만 이 여행에는 종점이 없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전에 한 사람이 기차에 내려야 할 때는 묶인 발목 중에 한쪽을 자르고 내려야 한다 오, 결혼은 중요해 그러나 인생은 더 중요해 결혼이 인생을 흔든다면 나는 결혼을 버리겠어 묶인 다리.. 詩 2018.12.08
능 금 / 김춘수 능 금 / 김춘수 Ⅰ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 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Ⅱ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 詩 2018.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