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 / 정호승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한때 벽 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 속의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 물 한잔에 빵 한조각을 먹을 뿐이다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누구나 부수지 못하는 벽을 두고 산다. 불가능이라는 절망이기도 하지만 자제를 바라는 이성의 울타리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벽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시각이다. 두두려서 부술 수 없다면 돌아갈 수도 있다. 아니면 넘어가거나 돌아설 수도 있다. 더 열린 마음이라면 계율로 삼을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극복과 해결이라는 성취에 너무 중독되어 있다. 벽을 만나면 어떻게 하던지 신속하게 해결해야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한다. 그러한 능력이 자존의 의미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떠한가. 결함이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은 완전한가. 줄여 결론을 짓는다면 벽이란 스스로 설정한 판단이라는 말이다. 견고하거나 허술하거나, 중요한 일이거나 사소하거나 모두 생각에서 오는 것이다. 난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여유가 더 소중하다.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내 자신의 팔이 마음에 돌을 던지더라. 다 버리려니 평화만을 원한다. 적어도 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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