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웰 다잉'의 한 해석 / 이찬수 역사적 예수 서기전 64년에 로마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식민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런 뒤 도시화를 도모했다. 그러자 성전이 있던 도시 예루살렘에서 거리가 먼 지역일수록, 농촌 지역일수록 그 흐름에서 소외되었다. 많은 농민들 중에 빈자들, 거지들이 속출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보잘 것 없는 동네 갈릴래아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이러한 사회 구조를 비판했다. 단순히 비판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판에 부응하는 실천적인 삶도 함께 살았다.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면서 인간 평등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다. 낮아진 이들이 도리어 높아질 때가 오리라며 이들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이들과 ‘밥상 공동체’를 이루어나갔다.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이들에게 밥을 마련해 주고 함께 나누면서 이 세상의 주인은 생명과 희망의 하느님이라고 가르쳤다. 이 밥상도 자기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며 몸소 가르치고 또 그렇게 믿었다. 바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고 실천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바실레이아 투 테우’를 직역하면, ‘신의 다스림’이 된다. 신이 다스리는 행위, 즉 신의 주권이 곧 하느님 나라이다. 인간이 아닌, 신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차별하고 억압하지만, 신은 생명과 사랑을 근본으로 하기에 차별당하고 억압당하는 이를 더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신은 생명의, 희망의, 구원의 신이었다. 지금의 현실이 비생명적이고 절망스러운 비구원적 상황에 처해있는 듯하지만, 신이 그러한 상황을 역전시켜주실 때가 곧 오리라는 희망을 예수는 온 몸으로 선포한 것이다. 그러면서 절망하는 죄인들과만 주로 어울렸다. 병자들을 어떤 형식으로든 치유해주면서 그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에게 큰 감화를 받았으며, 특히 로마의 도시화 과정 속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농촌 출신 빈자들이 예수를 따라 예수와 같은 선교에 나섰다. 이들은 정말 저분이야말로 하늘로부터 온 지혜에 근거해 가르치며, 그렇게 살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은 하늘이 주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기득권층, 종교 지도자들에게 큰 도전이었다. 예수는 정치 지향적이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에 비판적인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예수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존 지도자들에게는 위협이 되었다. 그런 예수가 모세의 인도 하에 이집트 노예생활로부터 탈출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갔다. 거기서 당시 로마와 결탁되어 있었던 성전 중심의 질서에 도전적인 발언과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서 예수는 신성 모독죄로 체포되었고, 로마에 반역을 도모한 정치범으로 몰려 로마 법률에 따라 십자가에서 사형당한 것이다. 서기 30년 4월경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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