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웰 다잉'의 한 해석 / 이찬수 죽음 그리고 심판 그렇다면 죽음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죽음이란 무엇인가? 삼라만상에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을 눈여겨 본다면, 죽음을 그저 심장이나 뇌 기능의 정지 등의 의료적 정의만으로 끝낼 수는 없을 것이다. 좀 더 의미를 담아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죽는다는 것을, ‘나’라는 것을 앞세우며 살아온 지난 날의 모든 삶을 전적으로 대 자연 앞에 내어맡기는 행위로 풀어보고자 한다. 종교적인 언어, 가령 그리스도교적인 언어로 바꾸면 죽음이란 인간 하나하나의 삶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생명의 근원이 되는 존재에게로 온전히 되돌려드리는 행위이다. 내 이름으로 행한 모든 생생한 실재들, 초등학교 시절에 놀던 학교 운동장 정글짐에 묻은 내 손 때마저 나의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라며 돌려드리는 행위가 죽음인 것이다. 신께 돌려드린다는 점에서 죽음은 심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모든 삶이 생생한 실재가 되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뜻밖에 성서학자 로핑크도 이와 상통하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하느님을 궁극적으로 만날 때, 하느님이 우리를 일생동안 사랑하시던 그 선하심과 사랑의 척도를 체험하는 가운데, 우리 눈이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열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서운 어떤 놀라움으로 우리의 독선, 우리의 무정함, 우리의 냉혹함, 우리의 이기주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한 평생 쌓아올린 모든 자기 기만과 환상이 일순간에 붕괴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숨겨두었던 가면들이 벗겨질 것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또는 다른 사람에게 연기해보이던 모든 것을 우리는 이제 중지해야 한다. 이는 끝없이 고통스러운 일이며 마치 불과 같이 우리를 스쳐 지나갈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 앞에서 찬란히 빛나실 때, 우리는 우리가 참으로 존재했어야 할 모습과 실제로 존재하던 모습을 동시에 깨닫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심판이며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적절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심판의 정도는 결국 인간이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비교될 때 드러나는 그 차이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이미 심판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의 몸을 온전히 벗어버릴 때 우리 자신의 본 모습, 실상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리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입장이라 하겠다. 이 때 죽음, 심판 등과 관련하여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시간 관념이다. 죽고 나면 분명히 우리의 몸은 사라진다. 몸이 없다는 것은 감각기관이 없다는 것이다. 감각기관이 없으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며 체험했던 우리의 온갖 체험이 사라진다. 그러한 체험이 사라지면, 우리의 의식을 지배했던 시간이 사라진다. 시간이란 어떤 사실이 지속되고 있음을 감각 기관을 통해 체험하는 한 양식이다. 우리의 몸이 어떤 사실들에 대해 순간순간 반응하는데 그것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흐른다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몸을 벗어버리고 나면 그러한 시간 개념도 사라진다. 보고 듣고 만지는 온갖 감각기관들이 정지하기 때문이다. 이 때 비로소 시간을 넘어서게 된다. 그렇기에 죽음이야말로 시간을 넘어 영원에 참여하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인간은 이미 하느님 안에서 살아오고 있는 것이지만, 숨을 거두는 순간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 ‘나’라고 하는 존재는 더 이상 시간 안에서가 아니라, 시간의 저 편에 실존하게 된다. 몸을 벗어버리고서 참여하는 하느님 세계는 시간 내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세계는 영원하다. 하느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베드로후서 3,8)는 성서의 구절은 이런 식으로 풀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이 시간 너머, 즉 영원에 계시다면, 모든 사람이 전혀 다른 시간에 죽었다고 해도 ‘영원’에서 만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원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도식이나 흐름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의 차원에서는 과거와 미래를 나누지만, 과거에 죽은 이나 미래에 죽을 이나 모두 영원에 참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내가 숨을 거두는 순간 전 인류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 인류에 대한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도 이런 식으로 풀 수 있을 것이다. 몸을 버리는 순간 몸을 지니고 살면서 행한 모든 것이 영원의 세계에 결정적으로 합류하게 되니,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생(永生)이다. 신과의 만남, 그것은 영원한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이 때 그 신과의 만남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신이 준비해놓은 장치가 바로 ‘부활’(復活)이다. 이어서 살펴보겠지만, 부활은 우리가 흔히 영혼이라고 말하는, 즉 우리의 내밀한 삶의 총체에 신이 어떤 식으로든 형상을 입혀주는 사건이다. 육신은 사라지되 그 육신을 지니고서 행한 행위 전체가 입는 영적인 몸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런 해석들은 육신을 가지고 경험하는 시간의 차원을 넘어선 곳을 염두에 둘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죽음, 내세, 영원 등의 문제는 바로 이런 식으로 일반화시켜 표현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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