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개념의 기본적 이해 - 심상태 (수원 가톨릭대 교수/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적 사유(思惟)와 체험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추론하고 연역(演繹)할 수 없이 예기치 않게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나자렛 예수라는 실존 인물 안에서 절정에 이른 하느님의 자기계시(自己啓示) 안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신앙’, ‘믿음’의 개념적이고 성서적 의미를 해설하고 교회의 가르침의 성격을 파악하고 칼 라너의 신앙규정의 내용과 함께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적 성격에 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신앙’의 어원적 의미 ‘믿음’ 곧 ‘신앙’이라는 말은 크게 두가지 관점으로부터 이해 될 수 있다. 이 말은 객관적 인식의 한 차원으로서 의미와 한 인격존재에 대한 신뢰의 의미로 사용된다. 1. ‘믿는다’는 말의 일상적 의미부터 살펴 보기로 한다. “나는 오늘 김 신부님이 출강하시지 않으신 것은 몸이 불편하신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신부님은 평소에 병환으로 눕지 않으시는 한 늘 강의를 하신 때문입니다.” 이 진술에서 사용되는 ‘믿는다’는 말은 하나의 주장의 근거를 나름대로 가지고는 있으나, 그 근거가 전적으로 확실한 진술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믿음, 신앙은 명백한 지식의 결핍된 형태인 셈이다. 신앙은 반대설의 사실성 내지 진리성을 고려해야 하는 단순한 ‘의견’보다는 확실성의 정도가 강하지만, 분명한 근거에 입각한 ‘지식’보다는 확실성의 정도가 낮다. 이러한 ‘믿음’ 용어의 일상적 의미가 그리스도 신학 전통에도 작용한다. ‘믿는다’는 말은 서방세계에서 본시 종교적 전문용어가 아니라 하위단계의 한 인식양식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믿음’이라는 말은 그리스 용어로 ‘피스티스’(pistis; πιστις)이다. 기원전 5, 4세기에 그리스에서는 이 ‘pistis'란 말이 ‘주관적으로는 확고하나, 객관적으로는 근거없는 의견’을 의미하였다. 때문에 이 말은 종교적 확신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 당시 사람들은 여러 신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가 아니라, ‘알고 있었다’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후대에 여러 신에 대한 고백을 ‘pistis’라고 표현한 것은 제신종교(諸神宗敎)는 미신(迷信)이며 근거없는 의견이라고 과소 평가하기 위해서였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83-322/21) 이래 ‘믿음’이란 말은 ‘앎’(知識)과 비견되기에 이르렀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인식양식(認識樣式)의 범주에 들게 되었다. 이 인식양식의 범주의 상극에는 한 실재에 대한 통찰(洞察)에 입각한 ‘지식’이 있고, 그 반대 하단에 확실성이라고는 없이 아주 미약한 근거에 의지하는 ‘추측’(推測)이 위치한다. ‘지식’과 ‘추측’ 사이에는 ‘의견’(意見) 내지 ‘소견’(所見)이 있다. 이 ‘의견’은 괄목할 만한 근거에 입각하여 판단하지만, 반대 의견도 옳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믿음’, 곧 ‘신앙’은 ‘의견’과 ‘지식’ 사이에 위치한다. ‘신앙’은 ‘지식’처럼 주관적 확실성과 확고성은 지니나, ‘의견’과 같이 객관적으로 타당한 통찰은 결여되어 있다. 신앙은 특정한 실재를 진실하다고 간주하고 동의하지만 두루 알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파악된 신앙은 지식의 한 결핍 형태라고 볼 수 있다. 3, 4세기의 이른바 교부시대(敎父時代)부터 이 철학적인 신앙개념은 서방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을 위한 매우 결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 354-430)에게서 신앙은 동의에 의해 지탱되는 생각으로 규정된다.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의하며 생각하는 것이다”(credere nihil aliud est cum assensione cogitare). 이 신앙개념은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 속에서 주도적인 개념이 되어 왔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신앙과 지성 및 이성은 서로 비견되고 연관지어져 왔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또는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Intelligo, ut credam)와 같은 정식(定式)들이 많이 사용되어 왔다. 켄터베리의 안셀모(Anselmus Canterbury, 1033-1109)는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유명한 정식을 남긴 바 있다. 그에게서 신학적 이성은 처음에는 ‘단지’ 믿게 된 진리를 추후적으로 동의할 수 있게 만든다. 여기서 신앙은 지성적 이해를 추구하는 인간적 처신으로 규정되고 서방 그리스도교의 주류적 기본 자세가 되다시피 한 것이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율법’(律法, lex; law)을 인식하는 이성(ratio)과, ‘복음’(福音, Evangelium)을 인식하는 신앙을 예리하게 구별한다. 루터의 신앙관은 ‘역설적이기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와 같은 정식을 형성하였다. 신앙의 역설성(逆說性)이 강조되는 여기서도 결국 신앙은 다른 ‘이성적 인식양식’과는 극단적으로 구별되고 상반되는 하나의 ‘신앙적 인식양식’으로 머물고 있다. 오늘날까지 가톨릭 교회나 개신교를 지배해 오는 서방 그리스도교 신앙개념은 이를테면, ‘인식적 신앙’ 개념인 것이다. 신앙은 다른 인식양식들, 즉 이성적 인식양식 내지 지성적 인식양식 등과 우호적 관계에 있거나, 아니면 적대적 관계에 있는 인식양식으로 규정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관은 성서에서 원천적으로 계시된 진리인식에 입각한 것으로 풀이되어 왔다. 2. 그런데 ‘믿는다’는 말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우리가 한 친구의 약속에 대해서 ‘좋아, 나는 너를 믿는다’고 대답할 때, ‘너는 나에게 너의 성실성을 충분히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네가 말하는 상태 그대로를 믿을 수 있다는 충분한 객관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는 이 근거를 믿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믿음, 신앙은 ‘사상적’(事象的), 즉 사물적 근거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친교관계를 통해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드러난 한 인격과 상관한다. 여기서 뜻하는 믿음, 신앙은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 신뢰행위이며, 그러기에 인격체들의 상호결합을 이룩한다. 이렇게 이해된 신앙은 인격체 속에서 본래 합일된 오성(悟性)과 의지(意志)를 포함하는 인간의 전인적 행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믿음, 신앙은 지식의 결핍된 양식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살아가면서 관계를 맺게 되는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인격적 인간의 원초적 신뢰행위이다. 삶의 결정적 상황에서 사람은 객관적으로 증명된 지식만으로 생활하지도 않고 결단을 내리게 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일반적으로 신의(信義)와 신앙에 정초하고 있다. 인격 상호 간의 신뢰없이 인간의 공동생활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남으로부터 신뢰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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