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그리스도교 발생의 역사적 배경 / 오강남 2

필부 2008. 9. 21. 23:34
 

그리스도교 발생의 역사적 배경 / 오강남 복음서를 기초로 예수님 알아보기 최근까지도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알기 위해서는 지금 그리스도교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한 4복음서(福音書)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많은 학자들이 문헌학,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 해석학 등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의 역사적 모습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을 연구하므로 복음서 기록에만 의존해서 생각하던 종래까지의 예수님 상과는 사뭇 다른 예수님 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새롭게 등장한 예수님에 관한 이론들을 소개하는 일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선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서를 기초로 하여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살펴보도록 한다. 이런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처음부터 명심해야 할 사항은 지금 『성경』에 포함된 사복음서가 결코 예수님의 삶이나 가르침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전기(傳記)나 역사적 보고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자기들의 믿음을 증언하는 일종의 ‘신앙 고백서’ 내지 자기들의 믿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는 ‘신앙 해설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기 위한 ‘믿음의 책, 믿음에 의한 책, 믿음을 위한 책’이다. 따라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 상은 사진 기자가 찍은 사진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유화를 그리듯 계속 덧칠해서 이루어진 일종의 초상화인 셈이다. 복음서가 이렇게 역사적 자료서는 불충분하지만 적어도 초기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고백했던가 하는 것의 일단을 보여주는 자료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기초로 그의 삶의 큰 줄거리를 짚어보기로 한다. 창시자 예수 ‘창시자 예수’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따지면 예수님은 그리스도교를 창시하지 않았다. 엄격히 말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니 ‘그리스도인’이니 하는 말도 모르고 어디까지나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으로 죽은 셈이다.2)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에 기초한 종교라 할 수 있고 그가 아니면 그리스도교가 있을 수 없었다는 뜻에서 그를 창시자로 보는 것이다. 1) 출생과 성장 예수님의 출생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헤롯왕 때에’ 태어난 것으로 되었는데, 그렇다면 헤롯이 죽은 기원전 4년 이전이어야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 앞부분(2:1-4)에 보면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 호구조사를 하라는 명을 받고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갔다가 거기서 아기를 낳았다고 되었는데, 역사적으로 구레뇨가 총독으로 있은 때가 기원후 6년에서 9년이 된다. 이렇게 엇갈리는 연대 중에 보통 『마태복음』의 기록에 따라 예수님의 출생연대를 기원전 4년경으로 보고 있다. 사복음서 중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예수님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두 복음서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약혼만 한 처녀 상태에서 성령으로 임신을 했다는 것과 그가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약혼자는 목수 요셉이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아기가 태어났을 때 동방에서 별을 보고 ‘동방 박사’들이 선물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아기를 경배하러 찾아왔다고 한다. 여기서 동방박사들이란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들이었다.3)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그 당시 왕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 하니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일러주었다는 것이다. 이집트로 간 세 식구는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서 살다가4) 헤롯이 죽고 갈리리 지방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게 되었다. 『누가복음』에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아기가 태어나던 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사들의 기별을 받고 아기를 찾아와 구유에 누인 아기를 경배했다.5) 태어난 아기는 규례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봉헌식을 치루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사람이 있었는데,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 아기가 오는 것을 보고 받아 안고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2:29-32)하는 말을 했다. 부처님이 태어났을 때 아시타 선인이 아기에게 와서 한 말을 연상하게 한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자라나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은 사복음서 모두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갈릴리는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곳이었다. 예수님의 성장기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잠깐 언급된 것 이외에 없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가 열두 살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유월절을 지키러 갔다가 부모가 집으로 가는 것도 모르고 성전에 남아서 종교 지도자들과 『토라』에 대해 토의를 했는데,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2:47)는 것이다. 길을 가다가 그를 찾으러 되돌아 온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했다.(2:49)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2:52) 2) 침례와 시험 세계 종교사적으로 그렇게도 중요한 그 ‘30세’가 되어 예수님은 침례 요한에게 가서 침례를 받았다. 그 당시는 물을 뿌리거나 바르는 ‘세례’가 아니라 전신이 요단강 강물에 잠기는 ‘침례’였다.6) 예수님도 물에 잠겼다 올라오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되고, 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영적 눈과 귀가 열린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침례를 받은 후 곧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광야로 나가 40일간 금식과 기도로 시간을 보냈다. 40일이 지난 후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그 시험이 세 가지였다고 하는데, 둘째와 셋째 시험의 순서가 각각 다르다. 『마태복음』의 순서대로 하면 첫째 시험은 사탄이 와서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4:4)하는 성경의 말씀으로 이 유혹을 물리쳤다. 둘째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아래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 시험도 이겼다. 셋째는 사탄이 예수님을 산꼭대기로 데리고 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고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는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쳤다. 이 시험을 요즘 말로 고치면, 순서에 따라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유혹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 성경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런 유혹을 모두 물리쳤다. 참된 종교의 목적은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처럼 경제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것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것 같은 초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막강한 영광과 권위로 세상을 휘어잡고 세상에 군림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삶에서 침례와 시험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게 궁극 실재와의 새로운 관계에서 가능한 ‘의식의 변화’(transformation)를 가져다 준 체험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이야기다. 이런 ‘특수 인식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지금까지의 일상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에서 완전히 ‘비보통적인’ 것으로 바뀌는 체험이다. 이제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말씀(로고스)’ 곧 우주와 삶의 참다운 ‘뜻’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도 ‘깨치신 분’ 곧 ‘성불하신 분’이라 볼 수는 없을까? 예수님 뿐 아니라 종교사를 통해서 볼 때, 붓다를 위시하여 무함마드나 최제우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특수 체험을 통해 새로운 의식과 확신으로 거듭 나게 되고, 이런 일이 가능한 후에 그 체험을 행동으로 옮겨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갈릴리에서의 활동과 가르침 예수님은 침례와 시험을 받은 후 갈릴리로 돌아가 외치기 시작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가장 처음 외친 복음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4:17)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최초 기별이자, 중간 기별이며, 또한 끝의 기별이었다. 그야말로 초지일관(初志一貫)된 기별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기별이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의 핵심이었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 기별의 참된 뜻이 뭔가 하는데 대한 해석은 학자들마다 다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친 이 기별의 뜻을 캐는데 그들의 관심을 집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예수님의 종말관’(Jesus’ eschatology)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문제였다.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