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인들은 왜 불교에 관심을 갖는가? / 최종석 2. 서구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1)

필부 2007. 2. 24. 09:57
 

서구인들은 왜 불교에 관심을 갖는가? / 최종석 2. 서구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 1) 종말론의 허구에 대한 반성 인류사에서 금세기는 가장 많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시대임에 틀림없다. 먼저 인구만 보아도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16억이었던 세계 인구가 한 세기 동안에 4배에 가까운 60억으로 증가했다. 이런 인구 증가율은 다른 어느 세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마찬가지로 금세기의 과학문명의 발전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 인류에게 생활의 편리함을 안겨 주었으며 의학의 발달은 인류를 많은 질병의 공포에서 해방시켰고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문명이 인류에게 진정한 행복을 선물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결국 과학문명이 인간에게 안겨다 준 안락함과 신속함은 인간의 삶의 터전인 자연환경의 파괴와 맞바꾸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핵무기는 전 인류를 단숨에 파멸시킬 수 있는 가공할만한 것이다. 이런 핵무기가 일부 극단론자들에 의해 오용되거나, 컴퓨터가 잘못 작동되어 참혹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인류 생존의 위기는 영화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항상 복병처럼 숨어 있다고 느끼게 한다. 한편 금세기를 풍요를 구가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이는 칼로리를 과다 섭취해서 성인병의 발병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에 불과하다. 지구 도처에서는 영양 실조로 어린이들이 2분에 한 명꼴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부(富)의 편중은 점점 심화되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긴장이 날로 증대하고 있다. 오랫동안 세계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냉전체제로 대립되어 오다가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결되었다. 그 붕괴된 이데올로기의 자리에 새롭게 종교와 결탁한 민족주의가 들어서고 있다. 민족주의를 표방한 종교적 분쟁들이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팔레스티나 지역, 북아일랜드, 체첸 지역, 동티모르, 아프카니스탄, 보스니아 등은 사실 민족주의의 옷을 입고 종교간의 갈등이 표면화 되어 분쟁이 일고 있는 곳이다. 이처럼 종교의 이름을 내세워 지구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 상황, 인구의 기하급수적인 증가에 따른 식량 부족 현상, 과학문명이 초래한 생태계의 위기를 보고 서구에서는 다시 인류의 역사상 가장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가 도래했다고 법석을 떨고 있다. 불투명한 미래를 종말론자들은 노스트라다무스(M. Nostradamus, 1503∼1566)가 예언한 지구 종말의 시기라고 주장한다. 그 문제의 구절은 이렇다. “1999의 해, 일곱번째의 달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앙골모아의 대왕을 부활시키려고 그 전후의 기간에 마르스는 행복의 이름으로 지배하려 하리라.” 이 구절에 근거하여 전세계의 종말론자들은 1999년 7월에 지구의 최후의 날이 온다고 주장하고 믿었다. 이에 한국의 공영 텔레비전 방송들도 맞장구를 치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중심으로 흥미 일변도의 종말론을 특집으로 꾸며 방영하였다. 이 특집 방송에서 여러 행성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십자가 형태로 재배열할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내용의 천문학(?)도 함께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 무덥고 야릇했던 1999년의 7월도 지나갔고 벌써 세 번이나 7월을 넘겼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쉬었는지 몰라도 종말론을 믿고 있던 기독교인들은 허탈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이미 999년에도 1000년이 되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예언하여 사람들을 일대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었다고 한다. 서구 사회에서의 이런 종말론은 거의 10년 단위로 있어 왔다고 한다. 1990년대에 우리 나라에서도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1992년 10월 28일에 지구의 종말이 오고 선택받은 자신들만 산 채로 몸이 하늘로 빨려 올라가 천국으로 간다는, 휴거설을 주장하여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던 적이 있다. 물론 이 휴거설은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당시의 잘못된 예언의 결과와 사회적 비판으로 그 자취를 감추기는커녕 아직도 도처에서 종말론을 무기로 삼아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1995년에는 스위스와 프랑스 및 캐나다에서 ‘태양의 사원(Solar Temple)’의 종말론 신도들이 연쇄적인 집단 자살을 하였다. 또한 1997년 4월에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샌디애고에서 ‘천국의 문(The Heaven’s Gate)’이라는 종말론 사교집단에서도 39명이 동반 자살하였다. 당시에 핼리혜성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였는데, 지구의 종말이 오기 전에 핼리혜성으로 옮겨 타야 한다는 것이 자살의 동기였다고 한다. 더구나 놀라운 일은 이 집단 자살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부분 고학력 소유의 백인들이었으며, 그 중에는 고위 공직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교집단은 연쇄 자살 사건 이후 당국의 강력한 제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잔존하여 그 세력이 유럽 및 캐나다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이런 종말론적 사교집단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구의 종말을 알리는 증후처럼 보여지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없을 것이라는 집단적 좌절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날로 심해지는 공해와 오존층의 파괴 현상에서 야기된 엘리뇨 현상과 같은 기상변이와 생물의 변종 등을 지구의 종말을 알리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런 현상에 대한 절망적 좌절감으로부터 종말론 집단들이 양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800년대 뉴욕에서는 미래에 대한 어두운 예견이 풍미하였다. 뉴욕 시민들이 집집마다 마차를 소유하게 되자 당시의 미래학자는 장차 뉴욕은 점점 늘어나는 말들의 배설물로 가득 차게 되어 일대 재앙을 맞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그 예견은 빗나갔다. 이런 종말론의 바탕에는 기독교의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다. 세상의 종말이 오면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기독교 성경의 가르침이 종말론의 근거이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창조와 종말을 알리는 단선적 시간관이다. 이처럼 비관론적 종말론에 맞추어 미래를 예견하는 일에 서구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지친 것이다. 물론 오늘날 야기되고 있는 환경 파괴의 문제는 심각하지만 비극적 종말론은 더 이상 해결책도 위안도 아닌 것이다. 서구 사회는 신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과학적 세계관으로 이행된 지 오래되었다.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믿음보다는 과학적 인과론에 바탕을 둔 종교를 찾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는 과학적 인과론에 바탕을 둔 순환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에 종말론에 식상한 현대 서구인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류의 현재의 문제나, 앞으로 닥칠 많은 문제들을 종말론적 징후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인식하는 허구에서 벗어나려는 반성이 깊이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