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인들은 왜 불교에 관심을 갖는가? / 최종석 2. 서구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 3) 새로운 인간관과 가치관의 모색 오늘날 서구사회가 물질 만능주의와 철저한 개인주의로 인한 인간성 상실이라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불교는 어떤 대안을 갖고 있기에 서구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서구의 자본주의는 이미 주지하고 있는 것처럼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에 발생한 경제체제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며, 자유경쟁 속에서의 생산활동은 오로지 이윤 추구를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 서구 중세시대의 장원 경제체제에서는 이윤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지 못했다. 시민계급이 형성되고,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산업들이 가내 수공업의 수준을 벗어나 그 규모가 확대되면서 이윤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윤의 추구와 부(富)의 축적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경제이념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전통 속에서는 부의 축적을 결코 바람직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서구 사회에서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는 시기에 나타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인 칼뱅(1509∼1564)은 신약성서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구절을 로마시대의 귀족들을 빗대는 말로 해석하였다. 즉 당시의 부자란 귀족으로 태어나서 노예와 농민들을 착취하였기 때문에 윤리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칼뱅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하여 번 것은 깨끗한 것이며 누구나 부자가 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선택된 인간만이 신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데, 구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재산을 모아 잘 사는 부자들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칼뱅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이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진 것이다. 심지어 이윤이 신의 축복이라는 논리로까지 발전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의 중산계층인 시민, 상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산업혁명 이후에 칼뱅 사상은 자본주의 이념의 뿌리가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의 활동은 경제원칙에 입각하여 이루어진다. 이윤의 추구를 위해서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는 사회, 모든 것을 효율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경영하려는 사회가 바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이다. 더 나아가 실용주의의 가치관이 접목되면서, 모든 것을 현금가치(cash value)로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정당한 것인가 아닌 것인가의 여부는, 그것이 현금가치를 갖고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판단된다. 모든 판단의 기준이 현금가치화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자라난 현대인의 머리 속에 과연 어떤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는가? 현대인은 인간성의 파괴나 훼손보다는 물질적인 손해를 더 중히 여기게 되었다. 비록 인격에 손상이 가는 일이라 해도 돈이 생기는 일은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현대인의 삶의 목표는 인간 회복, 인격 완성이기보다는 보다 풍요로운 물질의 소유에 있다. 물질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인간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것이다. 폭력과 범죄의 근본적인 원인까지도 눈앞의 이익을 위한 싸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익을 더 많이 얻기 위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현대인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는 덫에 걸리게 된다. 모든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자가 되는 인간 부재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 이 싸움은 비단 개인적 차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익을 위해서는 어제의 친구가 오늘에는 적으로 돌아서는 비극이 끊임없이 연출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불교만큼 인간의 본연의 모습과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의 완성을 지향한 사상은 없다.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보살(菩薩, bodhisattva)이다. 보살에게 있어서 깨달음(bodhi)은 삶(satta)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보살은 현재의 삶을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구현하는 지혜를 지녔다. 일반적으로 보살이 가는 길로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내세운다. ‘깨달음을 얻는 길이란 곧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와 하나로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모든 존재 즉 중생이란 살아 있는 것이든 아니면 생명이 없는 것이든 간에 우리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환경이란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환경’이라는 말은 사실 ‘중생’이란 말과 다를 것이 없다. ‘중생’이란 대승불교에서 일체 유정과 무정을 모두 칭하는 말이다.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라는 뜻이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란 말을 ‘일체환경 실유불성’이라고 바꾸어 놓아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웃이라는 개념의 외연을 넓혀서 중생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도 크게 잘못이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대승보살의 이상(理想)은 현대사회가 요청하는 생태적 가치관과 생태적 인간관을 제시한다. 대승보살은 세계의 모든 현상이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달은 존재이다. 모든 사물이 자신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 즉 생물과 무생물에까지 사랑을 보낸다. 이와 같은 지혜의 실천에서 오는 끝없는 사랑이 자비(maitri-karun.a?이다. 자비는 불교의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기본윤리이고 더 나아가서 모든 존재 사이에 기본이 되는 생태윤리이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인간성의 상실과 가치관의 전도, 개인주의의 피폐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는 인간성의 회복에 있다. 인간성의 회복은 불교의 연기법에 따른, 모든 삼라만상이 자신과 유기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결국 불교의 목표인 인격의 완성은 바로 나와 이웃이 동일체라는 것을 깨닫고 무한한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나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온 세계를 빈곤과 무지와 괴로움이 없는 이상 세계, 즉 생태적으로 온전한 불국토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대승 보살적인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살은 자신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들과 일치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보살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완성하게 하는 길이 여섯 가지로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보시, 인욕, 지계,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이다. 보통 육바라밀은 피안에 도달하게 하는 수단으로 취급되어 왔으나, 바라밀(pa?amita?의 뜻이 완성인 것으로 보아 육바라밀은 여섯 가지 완성되어져야 할 보살의 삶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이 완성해야 할 삶의 양식으로서 보시(布施)는 ‘준다’는 말이다. 무엇을 준다는 것은 나에게만 머물지 않고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 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나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고 때가 되면 흘러갈 수 있도록 열어주는 것이 바로 보시라고 말할 수 있다. 보시는 마치 흐르는 물이 한 곳에만 머물지 않는 것처럼, 모든 관계들이 살 수 있도록 흘러가게 하는 생명의 원리인 것이다. 보시를 통해서 모든 존재와의 연대감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박탈감이나 소외감을 극복하는 ‘더불어 사는 삶’은 바로 보시를 통하여 구현 가능하게 될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을 소유의 방향으로만 투사시킬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존재하고 있는 모든 존재를 향해 열려 있는 삶으로 지향하는 보살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 이 욕망의 절제를 환경보살이 가야할 두번째 삶의 양식인 인욕(忍辱)이라 할 수 있으며, 이렇게 자신과 전 존재가 하나의 유기체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알고, 이 대전제 앞에서 자신을 극소화시키는 삶을 지킬 줄 아는 것을 지계(持戒)라고 할 수 있다. 정진(精進)은 이러한 생태적 균형 잡힌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보살은 쉼 없이 노력해야 함을 의미하며, 이러한 노력으로 보살은 마침내 모든 존재와 원만한 관계성을 회복하여 평화로운 삶의 환경을 유지하는 것을 선정(禪定)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보살의 완성되어져야 할 삶의 양식은 모두 모든 존재가 나와 뗄 수 없는 관계성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혜(智慧)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보살의 길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환경의 문제나 개인주의의 피폐는 그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보살의 삶은 서구의 현대인들에게 외적인 재물, 권력, 향락 등의 추구가 참다운 삶의 모습이 아님을 알게 하고, 참다운 인간성 회복, 인격완성의 길이 무엇인가 보여준 것이다. 서구인들은 인간성의 회복과 새로운 가치관의 르네상스(renaissance)가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보살의 길을 따르는 데 일어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불교의 세계관이나 인간관이 미래에 희망을 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서구 사회에 수용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으며, 인류가 새로운 사고의 전환을 꾀하는 한 미래는 결코 암울하고 절망적이지만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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