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다른 곳에서 / 오세영 그렇게 마냥 서 있었다. 한곳에 기다림의 막다른 곳에 걸어서 걸어서 이제 서 있어도 걷는 것이 된 그것을 나무라 할까, 그것을 꽃이라 할까, 산마루에 멍청히 서있는 측백 혹은 소철 한 구루, 걷다가 걷다가 지쳐 짓누르는 어깨의 세상 짐들을 부리고 너의 이름을 부리고 너를 부리고 마침내 막다른 그곳에 와서 나무는 세상에 늘어뜨린 제 그림자를 걷으려 스스로 꽃과 잎을 벗어버린 채 홀로 하늘을 진다. 산이 된다. 비가 내린다. 창 넘어 개천은 배부른 물살로 출렁거린다. 무성하게 자란 풀밭 사이로 초록 물결이 넘실대며 흘러간다. 무심히 물살을 바라보며 손을 내저어본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세월이 회한처럼 가슴을 쓸어내린다. 가슴에 깊고 푸른 강물로 허리띠를 두르고 살아간다. 도대체 내 이마는 무겁고, 눈 아래 검은 점은 짙어져 가고, 가슴에 뚫린 작은 동공이 커져서 온갖 바람이 스쳐 지난다. 구름이 흘러가고, 비바람이 불어대고, 날마다 노을이 물들고, 산이, 바다가, 꽃과 나무가, 밉고 고운 얼굴들이 수시로 드나든다. 그러나 언제나 떨어진 흔적을 줍다보면, 그것들이 쓸쓸함이란 걸 확인하게 된다. 줍고 난 자리에 적막과 같은 회한이 돋아난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사소한 것들까지, 부질없는 사연까지, 모두 그리움이라는 못다 이룬 사랑이 된다. 얼마나 더 사치스러운 감정의 화장으로 몸살을 해야 고요해 질 것인가. 정녕 숨죽이고, 생각을 멈추는 순간에야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평화 또한 생각일진대, 생각이 슬픔을 불러 모으고 있으니 막다른 곳이란 마음에 있는 것. 나는 비에 젖은 나무이고, 산이 되어 아침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