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진짜 이유 / 최준식 교수 6

필부 2006. 5. 28. 09:37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진짜 이유 / 최준식 교수 2)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은 타락이 아닌 (고뇌에 찬) 진화의 모습 그런데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 사건을 인간의 타락이라고 보았다. 인간이 끝없는 고통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는 의미에서는 타락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타락이라는 어휘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내가 보기에 타락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심대한 문제점이 발견된다. 우선 에덴 동산이라는 곳이 정말로 낙원이었나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상태가 어떻다고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 상태를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에덴 동산이 낙원인가 아닌가에 대한 것은 사람이 주관적인 입장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누누이 지적했다시피 그들은 아직 주객관이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라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판단을 전혀 내리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낙원인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이 전혀 없다. 게다가 그들은 아직 낙원은 좋은 곳이고 지옥은 나쁜 곳이라는 이원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아직 선과 악이라는 이원적인 개념을 구별해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태를 진정 낙원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들에게는 그저 낙원도 낙원이 아닌 것도 아닌 '혼몽'의 상태 아닐까 싶다. 여기에 대한 이해가 어려우면 아기들을 연상하면 된다. 엄마 품속에 있는 아기들이 거기가 낙원인지 지옥인지 어찌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요건은 앞의 것과 직결되어 있다. 이 점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윌버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그는 《아트만 프로젝트》4)라는 자신의 저서 1996년 판(초판은 1980년) 서문에서 이 점과 관계해서 실로 날카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4) 이 책의 제목은 말 그대로 'Atman Project'이다. 굳이 번역하면 '아트만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윌버에 따르면 이 온 우주의 역사는 아트만이라는 대령(大靈, Sprit)이 스스로를 구현해 나아감에 따라 진화해가기 때문에 붙여진 제목이다. 이 점은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역사는 모든 인간이 신과 하나가 되는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나간다는 주장과 대단히 흡사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윌버 책을 이미 두 권이나 번역한 조효남 교수가 이 책의 제목을 '아트만 투사'라고 번역한 것이다. 투사는 preject가 아니라 projection인데 조 교수에게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윌버에 의하면 인간의 진화 과정에 대한 낭만주의적(romantic) 견해는 인간이 원래 신과 하나인 지고의 상태에 있다가 거기에서 타락을 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정이다. 그 다음 단계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해서 신과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와야 인간의 진화는 끝이 난다. 이런 모습은 대부분의 신화에도 나타난다. 인간은 최초에 신과 같이 있으면서 낙원에 있다가 실수로-혹은 죄를 짓고-신에게서 격리되어 인간계로 떨어진다. 그런 인간을 불쌍히 여겨 신은 구세주를 보내 인간을 구한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 구세주로는 무당이 그 역할을 맡게 된다. 이 과정에 대해 윌버는 첫 번째 과정에 대한 묘사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자신도 이전에는 낭만주의적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따랐는데 최근에 와서 잘못된 점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견해에서 잘못된 점은 첫 번째 단계를 낙원이라고 묘사한 것이다. 낭만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의식하지 못하는 천당(unconscious heaven)'으로 시작해 '의식하는 지옥(conscious hell)'을 거쳐 '의식하는 천당(conscious heaven)'의 순서로 진화한다고 한다.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자의식이 생기기 전에는-대략 두 살 전에-아담과 이브가 에덴이라는 낙원에 살았듯이 천당에 살지만 의식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타락하면 그 낙원의 상태에서 쫓겨나가게 되고 당사자들은 자신이 지옥에 들게 된 것을 알게 된다. 이때가 지옥 단계라는 것은 앞에서 익히 설명했으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당사자가 신(혹은 절대적 실재)과 재결합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천당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이 절대적 실재와 재결합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의식하는 천당'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첫 번째 상태이다. 이 상태는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다. 두 번째 단계로 도약하는 준비 단계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단계는 두 번째 단계보다 하위의 단계이지 그보다 수준이 더 높은 단계가 될 수는 없다. 이 단계는 앞에서 본 것처럼 아직 주객이 분리가 안 된 하위의 단계이다. 이런 단계가 낙원일 수는 없다(낙원이라고 느낄 수 있는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낙원도 지옥도 아닌 그저 몽환 같은 상태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굳이 말한다면 지옥의 단계인 두 번째 단계로 간다는 의미에서 이 첫째 단계도 지옥의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 의식하지 못하는 지옥의 단계이다. 따라서 이것을 윌버는 '의식하지 못하는 지옥(unconscious hell)'로 불렀던 것이다. 천당이라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한번 분리된 다음에 수준 높은 차원에서 결합될 때 만들어지는 것이지 주객이 나뉘어지지도 않은 상태는 참담한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리라. 윌버는 자신 있게 세상에 있는 모든 특수자(particular)-즉 모든 사물-는 그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절대적) 실재와 떨어져 있는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항상 그 실재와 하나가 되어(union)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게 절대적 실재와 떨어져서는 어떤 사물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의 근원이 없이는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그 다음에 남은 일은 그 결합 상태를 의식하느냐 의식하지 못하느냐와 같은 두 가지 경우의 수만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미 윤회의 세계라는 생사고해(삼사라)로 들어오는 것이지 낙원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아기들은 자신이 삼사라에 태어났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그런데 아기들은 왜 이리 평온할까?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마치 그들이 천당에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할까? 여기에 대해 윌버의 생생한 말을 들어보자. 아기의 자아는 상대적으로 볼 때 평화스럽다. 그것은 그가 천당에 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지옥불을 기억할 만큼의 충분한 인지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기는 가장 확실하게 삼사라의 세계에 침몰되어 있다. 다만 모를 뿐이고 충분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 깨달음이란 결코 이런 유아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5) 윌버(1996) 『아트만 프로젝트-인간 발달의 초개인적 관점』(초판은 1980), 퀘스트 출판사(Quest Books), p. xi. 인간은 태어나면 삶과 죽음이 횡행하는 윤회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이지 그것을 모두 초월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난 현실은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라고 하는 것이다. 윌버는 이 상태를 두고 아무 감각이 없는 '동상(凍傷)의 상태'로 비유하고 있는데 탁월한 해석으로 생각된다. 6) 윌버, 『모든 것의 역사』, p. 278. 이해를 돕기 위해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자. 우리는 위에서 말한 세 단계 가운데 첫 번째 단계를 전인격적(pre-personal) 혹은 전자아적 단계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아직 자아의식이 태동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pre)'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아가 없다는 의미에서 몰(沒)자아적 단계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두 번째 단계는 '전'이 빠진 그냥 인격적(personal) 혹은 자아적 단계이다. 드디어 개인이 탄생한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바로 이 단계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위에서 본 것처럼 죽음과 욕심 등 수많은 인간의 일들이 예서 벌어진다. 인간은 여기에서 나름대로 문제를 풀어보려고-다른 표현으로 하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고 해도 좋고 혹은 '궁극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서'라고 해도 좋다- 온갖 일을 한다. 돈과 권력과 이성 등의 탐구를 통해서 수많은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본 것처럼 이러 시도는 모두 무위로 끝나고 만다. 그래서 이 생의 모든 것은 허무하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허무로 끝나고 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는 그 다음 단계가 있다. 이름하여 초인격적 (trans-personal), 혹은 초자아적 단계이다. 7) 이 단계들은 다른 용어로도 표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잠재의식적인(subconscious) 단계부터 자의식적인(self-conscious)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초의식적인(superconscious) 단계로 나누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세 번째 단계야말로 인간이 가야 하는 마지막 종착역이다. 이곳은 인격적 단계에서 풀 수 없었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는 단계이다. 인격적 단계에서 생겼던 모든 문제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자의식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 자의식을 초월하면 모든 문제가 풀릴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바로 이 영역으로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까지 가지 않는 한 인생에는 그 어떤 것도 의미 있는 일이란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루어야 한다. 아직 이 두 번째 단계에 대해서 할 말이 남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두 번째 단계로 돌입하는 것은 결코 타락이 아니다. 비록 너무나 힘들고 엄청난 고뇌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이 단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면 인생의 종착역이라 할 수 있는 초인격적 영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두 번째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예외적인 일이 일어나도 전인격적 단계에서 초인격적 단계로 월반해서 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아직 자기에 대해 눈도 뜨지 않은 유아가 도인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자아를 초월한 단계라는 제 3단계의 입장에서 보면 자아를 초월하는 게 가능하려면 초월할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1단계에서는 자아(의식)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월할 대상도 없다. 초월할 대상인 자아가 생기는 것은 2단계에서이다. 따라서 1단계에서 바로 3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고 반드시 2단계를 거쳐 가야 한다. 이런 순서로 발달하고 진화하는 것은 절대로 바뀔 수 없는 사실이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이 신화와 관련해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사항은 인간 발달 단계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이다. 한번 진화하면 다시는 그 이전 단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거의 대부분의 인류는-영아들은 제외하고-제 2단계에 속해 있다. 8) 거의 대부분이라고 한 것은 제 3단계에 들어간 인류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깨달음의 임계점을 통과한 인류는 매우 한정되어 있지만 이전 시대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인류들이 3단계 가까운 쪽에서 그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는 이전 단계인 1단계로 돌아갈 수 없다. 다시 동물의 상태나 영아의 상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퇴행이라는 병적인 체험도 아무리 강도가 강해봐야 2단계 안에서의 퇴행이지 그 전단계까지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 되었으면 끝까지 인간이지 다시 동물의 상태로 내려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격의 포기가 된다. 이렇게 우리가 다시는 전 단계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아담과 이브 신화의 기자도 알아챘던 것 같다. 이 신화에서는 두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뒤 신은 동산의 동쪽에 날개 달린 존재 -아마도 천사일 듯-를 세워놓고 '빙빙 도는 불칼'을 들게 해 생명의 나무로 이르는 길을 지키게 했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화의 기자는 에덴을 낙원으로 생각하고 죄인인 아담과 이브에게 벌로써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하게 이런 조치를 했다고 썼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어떻든 두 사람이 에덴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기정의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그 다음 단계로 향하는 일뿐이다. 유아 때의 상태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사실은 좋다는 것도 알 수 없지만-인간은 절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이는 천사들이 불칼을 들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자궁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듯이 진화의 발전 과정은 거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