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얀 물감을 붓에 묻혀 획을 긋다 멈춘 줄 알았어요. 어쩜 한 방향으로 젖혀졌을까요. 봄의 슬픔이 목에 맺힌 어여쁜 이의 입술이었어요. 가지마다 불을 밝힌 촛불이었어요. 바람 부는 데로 얼굴을 내미는 하얀 불꽃이었어요. 입을 오무린 채 잔뜩 부끄럼을 타고요. 이내 입을 벌리고 목젖까지 내뵈는 백목련은 가냘픈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품어 나오고, 꽃향기 익는 봄으로 현기증이 납니다. 백목련이 꽃그늘을 드리웠어요. 나는 백목련 꽃그늘에서 마음의 이완을 청해 봅니다. 순백의 순결이 눈에 맺혀 마음에 꽃이 되는 백목련. 백목련보다 정결한 꽃을 가슴에 피우며 백목련에 취하여 오늘 하루를 향기롭게 보냅니다. 2002 년 3월 2 백목련은 가슴에 품었던 하얀 입김을 토해내며 파란 하늘을 마시는, 심호흡 중입니다. 붓인 채, 촛불인 채 바람타고 흔들리다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해 속내를 모두 내보이고는 하늘을 향해 소원을 빌고 있어요. 백목련은 하늘 소리, 바람 소리, 세월의 섭리를 귀 밟고 있는 하얀 귀였어요. 꽃내음을 건드리려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더니, 내 귀에 가느다랗게 하늘 소리가 들리지 않겠어요. 백목련은 입을 벌리듯 피었다가 이 세상 모든 순수를 귀담는 귀가 되어 지는지 모릅니다. 이내 꽃그늘에 꽃잎을 떨구고 나면 백목련이 불렀던 님의 발길이 소리 없이 멀어지겠지요. 그렇다고 슬퍼할 일은 아닙니다. 푸른 잎들이 돋아나고, 일년을 푸른 정장으로 지낼 것입니다. 허나 잊지 마세요. 하얀 귀로 땅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가 당신이 슬픔에 잠기게 되면 행복을 일깨워주는 위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백목련의 언어는 순응이랍니다. 2000년 3월 3 白木蓮은 옷을 벗은 채 裸身으로 꽃을 핀다. 함초롬히 꽃망울을 머금고 있더니 밤새 내린 비에 입을 벌렸다. 하얀 입술을 벌려 속마음을 내 보이고 있다. 정결한 정절이 하얗게 풍겨 나오고, 白雪보다 순수한 사랑이 꽃으로 핀다. 그 그늘에 깔리는 봄을 줍는다. 곁에 선 수목은 연두색 잎을 내밀고 白木蓮은 맨몸인 채 꽃으로 노래한다. 이른 아침 두 그루 白木蓮에서 無心한 일상사 한 가닥 樂의 줄기를 잡는다. 옷을 입기 전 얼굴을 내보이는 白木蓮은 사랑하는 내 님의 얼굴로 다가선다. 나는 白木蓮의 裸身에 옷을 입힌다. 사랑이라는 옷을 입힌다. 오가며 망울을 터트릴 듯 말 듯 무심하게 서 있는 목련을 보았다. 오늘 이른 아침 활짝 꽃망울을 터트렸다. 입을 벌려 목구멍이 보이는 듯 하다. 내 님의 아련한 체취가 돋아나는 것만 같다. 백목련의 꽃잎이 떨어져 눕기 전 마음의 여백을 채워야 한다. 무엇이더냐. 물 한 모금 마시듯 맞으면 될 일. 따지고 구애받고 참기만 해야 할 일이더냐! 바람은 스쳐 지나고 구름은 흘러 세월만 가고 말 것을, 인생은 멈춰서 정지하는 일이 없으니 흔들리고 흔들리더라. 지난 세월을 탓하는 일 없도록 오늘을 살아보자. 내일이면 오늘을 또 다시 어제라 할 것을. 1999년 3월 백목련은 올 해에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몇일 전 서울에서 내려오는 고속도로에서 노랗게 꽃물을 들인 개나리를 만났고, 하얀 꽃망울을 붓처럼 매단 백목련을 다시 보았다. 무엇이 그리 급해서 벌거벗은 채 꽃부터 피우는지. 나는 영문을 몰라 당혹스럽게 꽃맞이를 하고만다. 오늘 어린 아이가 되어 코끼리, 곰, 호랑이를 구경하고 왔다. 아니 감옥살이하는 그들을 면회하고 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창살 사이로 서로를 지켜보며 누가 구속되었는지 혼란스러웠다. 그 곁에 백목련마저 없었다면 따사로운 햇볕도 부질없게 추위를 타고 말았을 것이다. 꽃부터 핀다고 나무랄 일이겠는가. 급한 것부터 처리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그게 인생인 것을 백목련은 가르치고 있다.
'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행담도 (0) | 2006.05.11 |
---|---|
[스크랩] 알 수 없습니다 (0) | 2006.05.11 |
[스크랩] 거기에 내가 앉아있었다 (0) | 2006.04.27 |
[스크랩] 꽃샘 나들이 (0) | 2006.04.27 |
[스크랩] 돋보기를 더듬어 본다 (0) | 2006.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