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형성론 / 송인설 (4) 자아 부정 영혼의 자아 부정은 능동적으로는 영이 육을 이기는 것이고, 수동적으로는 하나님이 고난올 통해 우리 육신의 소욕을 꺾으시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전자를 "능동적 자아 부 정'이라 하고, 후자를 '수동적 자아 부정'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하셨다. 그러므로 자아 부정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육을 죽여 영을 살리는 것이다. 영혼은 일단 중생하면 계속 자라난다. 그러나 영혼은 계속하여 욕망으로 가득찬 육신의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롬8:6). 그래서 영혼은 주의 뜻을 알면서도 번번히 육신의 욕망에 굴복하고 만다.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통곡했다.(롬 7:24). 자아 부정이란 이러한 육신 중심적인 옛 사람. 즉 옛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 고집, 자기 야망 등 육신의 욕망을 처리하는 것이다. 우리의 악한 자아뿐만 아니라 선한 자아도 처리하는 것이다. 선한 자아를 처리하는 일은 더 어렵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보기에 선한 자아라고 하더라도 자아는 결국 주의 뜻을 방해하기 때문에 부인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 (롬 8:I3) 하였고, 내 몸을 쳐 복종한다'(고전 9:27) 하였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l5:3I) 하였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갈 5:24) 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자아를 부정할 수 있는가? 우리의 영은 어떻게 우리의 육을 부정해낼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해야 한다. 십자가는 예수님 혼자 죽은 십자가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위해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모든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신하여 못 박혀 죽은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나의 십자가이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지신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묵상은 어느 한 순간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이것은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나는 성령의 조명의 역사요, 순간적인 깨달음의 사건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하고 선언할 수 있었다. 바울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일시되는 계시적 깨달음 속에서 자기를 부정할 수 있었다. 둘째, 우리는 자아가 다시 살아 움직일 때마다 믿음으로 자아의 죽음을 선포할 수 있다. 우리의 자아는 결국 죽음 앞에서 무너진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어차피 죽을 자아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미리 죽을 때, 우리는 종말론적으로 우리의 자아의 부정을 선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자아 부정은 하나님이 직접 고난의 방법으로 우리의 옛 자아를 처리하시는 "수동적 자아 부정'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신 후 반드시 당신의 열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려 하신다. 그런데 우리의 옛 자아가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막는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의 자아를 어떻게 그냥 놔두시겠는가? 우리가 우리 자아를 처리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자아를 무너뜨리신다. 사실 우리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스스로 부정해 낼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겉사람을 허무는 작업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자아 부정을 도우신다. 그러니 고난이 얼마나 고마운 하나님의 손길인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l19:67)_ '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ll9:71).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를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지 않은가? (히 5:8-9). 하물며 우리랴! 자아가 처리되면, 육은 살아 있어도 자기 주장을 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살아 있어도 죽은 자처럼 된다. 육체중심적 자아(옛 자아)가 부정되고 영 중심적 자아(새 자아)가 인격의 중심이 된다. 자아가 처리되면서, 우리는 전인적 구원을 맛보게 된다. 영이 구원받고. 정신(혼)이 구원받고, 또 점차 몸도 구원받게 된다. 우리의 정신과 몸이 우리의 영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쭉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l2:24) 자아가 처리된 사람은 진정한 '나'와 '나의 것'을 구분할줄 안다. 나의 주변 환경에 볕로 영향을 받지 않고 항상 천국을 누리게 된다. 자아가 처리된 사람은 자신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다. 다른 사람의 평가로부터도 자유롭다. 겉과 속이 같다. 한 마디로 겸손하고 진실하다.
'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문서의 최근 연구동향 / 배정훈 교수 I. 들어가는 말 (0) | 2006.05.02 |
---|---|
[스크랩] 영성형성론 / 송인설 교수 4 (끝) (0) | 2006.04.30 |
[스크랩] 영성형성론 / 송인설 교수 2 (0) | 2006.04.27 |
영성형성론 / 송인설 교수 1. (0) | 2006.04.26 |
[스크랩] 신학이란 무엇인가? / 최성호 (0) | 2005.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