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신앙’ 개념의 기본적 이해 - 심상태 5. 그리스도 신앙의 일반적 의미 (2) 完

필부 2017. 2. 23. 14:32

‘신앙’ 개념의 기본적 이해 - 심상태 (수원 가톨릭대 교수/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

 

 

5. 그리스도 신앙의 일반적 의미 2. 그리스도인들은 구체적 인물 예수의 등장과 역운 속에서 오늘날까지 어떠한 새로운 사건이나 체험으로도 능가하게 되거나 추월되지 않은 궁극적 실재와 진리가 발생하였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바로 예수 부활 안에서 발생한 하느님의 보편적 신성의 계시가 예수의 역사적 유일회성(唯一回性)을 모든 시대의 인간을 위한 그의 보편적 의미와 중재시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부활 전에도 보편적 신적 권능(權能)을 행사하였다. 그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자신의 현존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자신의 이름으로 행사하였다. 예수는 인간 각자의 운명이 바로 그 자신에 대한 입장 표명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주장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는 절대적 하느님만이 내세울 수 있는 권위를 감히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주장은 하느님에 의한 결정적 확인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예수는 하느님을 모독한 자로서 그리고 민중 선동자로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피소되고 로마 총독부 당국에 의해 판결되어 국사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하였다. 그리스도 신앙의 사활이 걸린 그의 부활은 생전에 그가 내세웠던 보편적 요청에 대한 하느님의 확인으로 볼 수 있다. “초대 그리스도교 사상의 지평 속에서 예수의 부활은 그에게서 이미 역사의 종말적 사건이 되어서, 그 자신과 그의 메시지와의 관계 여하에 따라 모든 인간의 궁극적 운명이 결정된다고 예수가 부활 이전에 주장한 것이 지금 예기치 않은 양식으로 확인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도래하는 하느님의 주권을 통하여 이끌려지게 될 역사의 종말이 예수의 등장과 역운 속에서 이미 현존하는 실재가 되어 있다. 이를테면 예수로부터 모든 사건과 인간의 정체성이자 본질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전승은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궁극적인 계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등장과 역운 속에서 역사의 종말이 이미 현전하는 실재가 되었고, 여기서부터 실재의 전체성이, 모든 사건과 인간적 삶의 본질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의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에 대해 말하고, 예수를 하느님의 종말론적 계시자로 선포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하느님은 예수와 함께 이미 도래한 종말론적 계시 과정을 통해서 역사에 내재하고, 역사의 전체성을 예수의 역사라는 역사내적 사건으로서 내심(內心)으로부터 규정하여서 만사를 포괄하는 실재로서 당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과 함께 역사의 종말이 이미 현존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전체로서의 역사 이해가 비로소 가능하다. 하지만 역사의 선취적 종말사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세계의 전체 의미를 포괄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고정적 원리로 이용될 수는 없다. 종말의 새벽인 예수의 부활은 인간 이성(理性)에게는 다마스커스로 가던 바울로의 눈을 멀게 했던 빛과 같은 것이다 (사도 9,1-9). 역사의 선취적 종말이 이토록 신비스럽고 파악할 수 없는 양식으로 역사 안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종말의 선취로부터 역사의 진행을 계산해 낼 수 없다. 한 개별적 사건이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자신의 온전한 의미를 개현한다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운에도 해당한다. “우리는 예수의 등장과 역운 속에서 본래 무엇이 발생하였는지를 종국적으로는 아직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보(留保) 자체가 이 사건의 궁극성에 속한다. 이 궁극성은 진전하는 시간과 이 시간에 매여 있는 인식의 역사적 상대성 한가운데에서는, 예수의 역운에 속한 의미의 인식이 아직 종결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계시가 궁극적으로 발생하였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종말의 ‘이미’(jam; already)와 ‘아직 아니’(nondum; not yet)의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계시가 예수의 역운 속에서 궁극적으로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종결되어 ‘현전하는’(vorhandensein) 어떤 것은 아니며, 예수의 역운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아직 우리 인간에게 종결되어 현전의 상태로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여전히 도래중에 있는 하느님의 계시의 장으로서 항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역사의 전체성이 예수에게서 발생한 하느님의 계시 전승의 과정 안에서 늘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실재의 전체성은 예수로부터 늘 새롭게 나타난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이 전체성을 확실케 하고 실현시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드러나는 전체성 내용의 제약적인 체험을 통해서 실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단계의 역사과정이 촉진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복음선포와 증거생활을 통해 만나게 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과 세계의 의미를 발견하고 예수의 삶에 자신을 의탁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실재의 의미는 자유와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계시된 하느님은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모든 세력을 이기는 분이다. 인간 존재의 최후의 적인 죽음까지도 무력화시킨 그리스도의 계시 속에서 어느 것에 의해서도 추월될 수 없는 계시의 궁극적, 최종적 성격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적 성격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예수의 인격과 역사(役事)를 직접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 전승(傳承, traditio)의 중재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역운(歷運)에 접하게 될 뿐이다. 그런데 이 전승 자체가 간접적인 전승인 것이다. 나자렛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구원자라는 그리스도 신앙고백은 객관적 인식의 차원에서 입증될 수 있는 보편적 진리가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외된 역사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분노와 조소를 자아내는 걸림돌이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부활을 하느님의 역사(役事)로 믿는 그리스도교회 당국과 그리스도인들은 이 예수의 비천함을, 그리고 걸림돌이 되는 신앙진리의 성격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이 현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었듯이 이웃을 위해 자신을 비워 가난하게 되는 -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 사랑의 삶이 부활한다는 희망의 신뢰행위이다. 현대 그리스도인은 역사적 인간 나자렛 예수가 만인에게 희망의 징표가 되는 보편적 사랑을 선포하며 살았다는 데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적 진리성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구원의 실재는 이웃과 세계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사랑임을 그리스도 교회는 선포하고 증거해야 할 것이다. 그때에 가서 역사적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성 주장이 그 신빙성을 비로소 제대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