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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줄 몸 한 채 / 김선우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 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 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 그 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結球)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 마음이 이미 길 떠나 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 걸 처음자리에 길은 없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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