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3. 사랑의 대상 c. 성애 성적 욕망은 융합을 지향하지만 결코 육체적 욕망, 고통스러운 긴장의 해소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적 욕망은 사랑에 의해 자극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의 불안에 의해, 정복하려는 또는 정복당하려는 소망에 의해, 허영심에 의해, 상처를 내고 심지어 파괴하려고 하는 소망에 의해 자극된다. 성적 욕망은 강렬한 정서와 쉽게 뒤섞이고 강렬한 정서에 의해 쉽게 자극되고 사랑은 강렬한 정서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는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사랑은 성적 결합의 소망을 일으킬 수 있다. 이 경우, 육체적 관계에는 탐욕이나 정복하려는 또는 정복당하려는 소망은 없고 부드러움이 섞일 뿐이다. 육체적으로 결합하려는 욕망이 사랑에 의해 자극되지 않는다면, 성애가 동시에 형제애가 아니라면, 이러한 욕망은 도취적이며 일시적인 합일이외의 합일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성적 매력은 순간적으로 합일의 환상을 일으키지만 사랑이 없는 한, 이러한 합일은 낯선 사람들을 이전과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져 있게 한다. 때로는 이러한 합일은 서로 부끄러워하게 하거나 심지어 서로 미워하게 만든다. 환상이 사라질 때 그들은 이전보다도 더욱 뚜렷하게 그들의 격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부드러움은, 프로이트가 믿고 있는 바와는 달라서, 결코 성적 본능의 승화는 아니다. 부드러움은 형제애의 직접적 결과이고 비신체적 사랑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신체적 형태의 사랑에도 있다. 성애에는 형제애와 모성애에는 없는 독점욕이 있다. 성애의 이러한 배타적 성격은 좀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흔히 성애의 독점욕은 소유적 애착으로 오해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서로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사랑은 사실은 두 사람 사이의 이기주의이다. 그들은 서로 동일시하고 있는 두 사람이고, 그들은 분리의 문제를 단일한 개인을 둘로 확대함으로써 해결한다. 그들은 고독의 극복을 경험하지만 그들 이외의 사람들과는 분리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서로 분리된 채로 있고 그들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곧 그들의 합일의 경험은 환상이다. 성애는 배타적이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전 인류를, 모든 살아 있는 자를 사랑한다. 나는 나 자신을 오직 한 사람과만 충분하고 강렬하게 융합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성애는 배타적이다. 성애적 융합, 곧 생명의 모든 면에 있어서의 완전한 위임이라는 의미에서만 성애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배척하며, 깊은 형제애라는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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