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3. 사랑의 대상 c. 성애 1)

필부 2009. 2. 16. 11:09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3. 사랑의 대상 c. 성애 형제애는 동등한 자들 사이의 사랑이고 모성애는 무력한 자에 대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각기 다르지만 이러한 사랑은 근본적으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내가 내 형제 중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나는 나의 모든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내가 내 애 중에서 어떤 애를 사랑한다면, 나는 나의 모든 애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나는 모든 애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애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형태의 사랑과 대조적인 것이 성애이다. 성애는 완전한 융합, 곧 다른 한 사람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성애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며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성애는 아마도 현존하는 사랑의 형태 중 가장 기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우선 성애는 흔히 사랑에 빠진다는 폭발적인 경험, 곧 그 순간까지도 두 낯선 사람 사이에 있던 장벽이 갑자기 무너져 버리는 경험과 혼동된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갑작스럽게 친밀해지는 이러한 경험은 본질적으로 오래 가지 못한다. 낯선 사람들이 친밀하게 아는 사이가 되면 이미 극복해야 할 장벽도 없고, 더 이상 갑작스럽게 접근할 수도 없다. 사랑받는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잘 알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거의 모른다고 말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상대방에 대해 더 깊은 경험을 했다면, 또는 우리들이 그의 퍼어서낼리티의 무한성을 경험할 수 있다면, 상대방이 이와 같이 친밀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장벽을 극복하는 기적은 매일 새로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곧 탐구되고 곧 고갈된다. 그들의 경우, 친밀감은 우선 성적 교섭을 통해 확립된다. 그들은 상대방의 분리를 우선 신체적 분리로 경험하기 때문에 신체적 결합은 분리 상태의 극복을 의미하게 된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에 대해 분리의 극복을 나타내는, 또 다른 요인들이 있다. 자기 자신의 개인 생활, 자신의 희망과 불안을 말하는 것, 자신의 어린애 같은 유치한 면을 보이는 것, 세계에 대해 공통된 관심을 확립하는 것 -이러한 모든 일은 분리의 극복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분노, 증오, 그리고 자제심의 완전한 결여를 보이는 것도 친밀감으로 여겨지고, 이것은 부부가 흔히 서로 느끼고 있는 변태적인 매력 - 이 부부는 잠자리에 들었거나 서로 증오와 분노를 발산시킬 때에만 친밀하다.- 을 설명해 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형태의 접근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희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타인 과의 사랑을 추구하게 된다. 이 타인은 다시금 친밀한 사람으로 변하고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다시금 유쾌하고 강렬하지만 이 경험은 다시금차츰 덜 강렬한 것이 되고 마침내 새로운 정복, 새로운 사랑을 -언제나 새로운 사랑은 이전의 사랑과는 다르리라는 환상을 품고- 바라게 된다. 이러한 환상은 성적 욕망의 기만적 성격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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