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칸트와 불교에 있어 존재와 인식 그리고 실천 / 최인숙 4. 실천하는 자아

필부 2007. 12. 17. 12:53
 

칸트와 불교에 있어 존재와 인식 그리고 실천 / 최인숙 4. 실천하는 자아 서양철학의 전통이 형이상학이었다고 할 때, 이 말은 서양철학에서는 존재론으로서의 이론철학이 우위에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계의 존재의 본질은 무엇이며,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함으로써 인간의 실천적인 삶의 문제에 대해서도 해답을 구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우선 규정함을 통해서(형이상학)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답도 가능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 이전까지는 대체로 윤리적인 문제는 존재론적인 문제에 포함되는 것으로, 혹은 윤리적 문제는 존재론에 부수적인 것으로 다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칸트에서 이러한 경향이 크게 달라졌다. 칸트에서는 이론철학(존재론과 인식론)과 실천철학이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그러한 구분은 칸트의 주요 저서인 《순수이성비판》(존재론 및 인식론)과 《실천이성비판》(윤리학)을 통해서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37)과 인식할 수 없는 대상,38) 그리고 그러한 대상들과의 관계에서의 우리의 자아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데 비해,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자아는 ‘인식하는 자아’를 다룬다면,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실천하는 자아’를 다루고 있다. 칸트에서 ‘인식하는 자아’는 주관에 주어지는 대상을 자신의 구조에 따라, 그리고 필연적인 인과율에 따라 인식하는 자아라면, ‘실천하는 자아’는 마치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는 듯이, 그리고 자신이 영원한 본질을 지닌 정신의 소유자인 듯이(신의 본성을 원형으로 하여), 행해야 하는 자아이다. 37) 경험 가능한 대상 세계이다. 38) 경험할 수 없으나 ‘생각할 수는 있는’ 대상, 예를 들어 절대적 신, 우주 전체 등의 문제를 말한다. 앞의 자아는 현상 세계를 넘어설 수 없지만, 뒤의 자아는 현상 세계를 넘어서서 절대적인 이성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명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 두 개의 자아는 마치 서로 독립적이며, 서로 무관한 자아인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현상의 세계에 속한다면, 다른 하나는 초경험적 세계에 속한다. 칸트의 이론에서 인간은 이원론적인 존재이다. 한편으로는 다른 존재자들처럼 필연적인 자연법칙에 속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적인 이성법칙에 속한다. 인간이 절대적인 이성법칙으로서의 도덕법칙을 준수해야 하는 근거는, 인간 자신이 절대적인 이성의 소유자, 절대적인 자유의지의 소유자라는 ‘사실’에 있다.39) 39) 순수이성은 그 자체로 ‘실천적(praktisch)’이며, 바로 순수이성이 우리에게 도덕법칙인 보편적 법칙을 부여해 준다(칸트, 《실천이성비판》, A 56: A는 초판). 칸트에서 ‘실천적’이라는 술어는 공리주의적, 경험주의적 의미에서의 실천을 전적으로 배제한다. 그것은 오로지 이성의 법칙에 따르는 ‘실천’만을 뜻한다. 칸트가 이전의 철학자들과 다르게, 존재의 문제와 윤리의 문제를 날카롭게 구분하여 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윤리학 또한 존재론의 체계에 속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필연적인 인과율이 적용되는 경험 세계에 속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초경험적 세계의 절대적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이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존재규정’으로부터, 인간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하는 ‘실천적 규정’이 나온다. 칸트에서 ‘윤리적 인간’은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인간’의 개념에 의해 이미 규정되어 있다. 인간은 절대적 이성법칙을 스스로에게 강제하도록(명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그러면 연기의 법칙에 속하는 불교의 인간에서 ‘실천’의 문제는 어떠한가? 불교는 근본적으로 실천의 철학이다. 붓다 자신이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그가 존재론적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라 할지라도 (예를 들어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통(苦)의 존재라는 등의 생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종국에는 그러한 인간 규정에 의해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길을 보이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중부경전》에 포함된 마룬캬풋타의 우화는 형이상학적 이론들에 대한 붓다의 태도를 아주 멋지게 묘사하고 있다.40) 붓다는 “세계는 영원한가 아닌가,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자아와 육신은 분리된 것인가 같은 것인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아닌가”라는 마룬캬풋타의 문제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고, 삶에 진정한 이익을 주는 길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으로 대신했다. 삶에 참으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고의 조건들 및 이들 조건들의 절멸에 관한 실천적 진리라고 붓다는 생각했다. 40) 존 M. 콜러, 《인도인의 길》, 246∼248쪽 참조. 불교의 실천철학적인 면은 대승불교 중에서 중관사상보다 유식사상에서 더 두드러진다. 중관사상은 공(空)의 관점에서 존재론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면, 유식사상의 경우에는 가치론에 기울어져 있다.41) 유식사상이 유가행파라고 불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연기의 세계, 윤회의 세계에서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불교의 근본 관심인 것이다. 41) 服部正明 외, 《인식과 초월》, 224∼225쪽 참조. 절대적인 신의 존재, 자유의지, 영혼불멸의 요청 위에 정초된 칸트의 이성론적 윤리학에 비교해 볼 때, 불교의 실천철학은 어떠한 형이상학적 존재도 전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니 모든 형이상학적 존재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적인 삶의 길은 완전히 스스로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앞에서 연기의 이론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밝혀졌듯이, 우리의 마음 역시 연기의 존재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란 것도 찰나마다 변해서 새로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겪는다. 내 마음이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것은 내가 타자들(인간 및 사물)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나 자신의 신체 및 마음과의 ‘관계에서’ 나의 마음을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가느냐에 달려 있다. 나의 마음, 정신의 존재는 나 자신에게도 미지의 것이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도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은 완전히 ‘창조적인’ 존재이다. 그것의 창조자는 바로 나이다.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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