散文

[스크랩] 그림자와 거울의 얼룩 / 이태동

필부 2007. 12. 11. 11:04

그림자와 거울의 얼룩 / 이태동 내가 그림자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된 것은 유년 시절 아버지가 울고 있는 나를 달래기 위해 등잔불 앞에서 손과 손가락을 움직여 벽장 문 위에 여러 가지 짐승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울음을 멈추고 벽지 위에 만들어진 이상하게 생긴 그림자 형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것이 흥미롭기도 했지만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아침에 학교 운동장을 걷고 있을 때면 내 그림자가 나를 뒤따라오고 저녁에 교문을 나서면 그것이 앞에서 나를 만나러 오고 있었다. 그때 나는 왜 그 그림자가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던 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것과 더불어 놀고만 싶었다. 또 그때 그 무렵 어느 해질녘 나는 시골집 앞으로 흐르는 샛강에서 세수를 하고 일어나 고개를 들었을 때, 산 그림자가 멀리 보이는 자줏빛 산등성이 아래로 비끼며 스쳐가는 것을 보고, 황홀한 아름다움의 신비감을 느꼈다. 내가 이렇게 그림자를 만난 경험 때문에, 그 후 다른 사람들이 그림자를 유령이라고 말해도 나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어렸을 때 유령에는 그림자가 없다는 말도 들었고, 중학교 때 그림자는 물체에 빛이 비치어 그 반대쪽에 나타나는 그 물체의 검은 형상이란 것을 배웠던 것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림자를 이야기할 때 그것을 물체가 빛을 차단한 모양으로만 보지 않고 거울 속의 얼룩처럼 사람의 얼굴이나 표정에 묻어 있는 우수憂愁에 찬 빛을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내면의 아픔이 얼룩처럼 밖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그림자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나는 환하게 웃는 얼굴 못지않게 우울한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대해 이상하게 마음이 이끌림을 느낀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가끔 다른 사람의 웃는 얼굴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간다고 느낄 때처럼 나 역시 속에 아픔을 느끼게 하는 지울 수 없는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리라. 이것을 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 얼굴에 나타난 우울한 그림자는 초월적인 현전現前의 세계에 묻혀 있는 존재의 뿌리에서 오거나 아니면 원죄原罪의 자국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 마음속의 그림자는 나르시스의 신화에서처럼 사물의 그림자와는 달리 지울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운명적으로 그것을 잡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우거나 아니면 그것과 일체가 되려고 하는 욕망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의 삶도 그 그림자를 추적하거나 그것에 도달하고자 하는 순례巡禮와도 같은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은 마음속에 묻어 있는 얼룩과도 같은 그림자를 결코 잡을 수 없는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마음속의 얼룩을 지우고 그림자를 잡으려는 슬픈 움직임 속에서 역설적인 기쁨이 있고 자아발견이라는 인식적인 깨달음이 있다. 그래서 얼굴에 아무런 슬픈 그림자가 없는 것 같은 사람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없는 백치 인형이나 다름없을 수도 있다. 순수하기만 했던 유년 시절 내가 그림자를 슬퍼하고 무서워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신비에 마력을 느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슬프고 아름다운 우리의 삶을 투영시킨 빛의 자화상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오늘도 종이 창문에 햇살이 비치면 그것이 지우는 창틀의 그림자에 시선을 던지는 일을 잊지 않는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다. 그렇지만 그림자가 없으면 빛의 의미가 없지 않을까. 천국은 빛으로 가득 찼겠지만, 그곳에는 그림자가 없기 때문에 웃음과 눈물이 만들어내는 유머도 없을 것이다. 나는 밝은 세계를 좋아하지만, 그림자 없는 세계도 좋아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림자 없이 밝기만 한 찬란한 천국의 궁전보다, 바람 불고 비 내리지만 그림자 스쳐가는 들판과 함께 쉬며 웃을 수 있는 짙은 나무 그늘이 있고,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사람의 마을을 더욱 좋아한다. Romance 첼로연주 달콤한 인생 ost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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