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老子 《道德經》 硏究 (二) / 朴 正 根 Ⅴ. 맺음말

필부 2007. 11. 20. 18:25
 

老子 《道德經》 硏究 (二) / 朴 正 根 Ⅴ. 맺음말 세상에는 하나의 비밀이 있다. ‘하나’에 관한 비밀이다. 비밀은 ‘하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를 찾으면 비밀의 열쇠를 풀 수 있지만, 문제는 하나를 찾을 수 없다는데 있다. 지금까지 먼길을 돌아온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있는 그대로”의 ‘하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급한 대로 ‘그 하나와 관련이 있는 일’이나 또는 ‘하나인 것’을 들여다봄으로써, 도대체 ‘하나’라는 것을 왜 잡을 수 없는지 하는 궁금증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이다. 지금부터 ‘하나인 어떤 것--아무 것이라도 무방하다--’을 살펴보자. 이 길을 떠나기에 앞서 우선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 있다. 하나, 우리가 어떤 것을 보게 되든지 우리는 ‘하나인 그것’의 안과 밖을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들여다보기’와 ‘내다보기’를 모두 해야 한다. 하나, 어떤 것을 보든지 그것 하나에서 그것 하나가 동시에 드러내는 세 모습(?)을 알아보아야 한다.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길을 떠나자. 먼저 ‘들여다보기’부터 하기로 하자. 우리가 ‘들여다보기’를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것 안에서 생성․유지․소멸이 동시에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변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각자 ‘자기’를 들여다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무엇이든 ‘들여다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31) 이제 우리는 ‘들여다보기’를 통해서 ‘어떤 하나인 것’에서 생성․유지․소멸을 보게 되었다. 이점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을 알게 하는데, 다름 아니라 바로 ‘그것’ 하나 안에서 ‘생성․유지․소멸’하는 많은 ‘어떤 것’들이 있다는 점이다. ‘나’라고 하면 나는 ‘생성․유지․소멸’한다. 이야기는 내 안에 ‘생성․유지․소멸’하는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들의 관계로 내가 나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기 ‘생성․유지․소멸’하는 세포들이 모이고 모여서 나를 이룬다. 나와 그 세포들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하나이다. 물론 ‘생성․유지․소멸’하는 각각의 세포 역시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가장 작은 하나와 하나이다. 이점을 기억하고 ‘내다보기’로 넘어가자. ‘내다보기’ 또한 ‘어떤 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인데 ‘어떤 것’과 ‘어떤 것이 아닌 것’을 보는 것이다. 나를 보기 위해서 ‘나 아닌’ 것을 본다는 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앞에서 이야기 한 ‘고향’을 다시 생각하자. ‘고향’은 ‘타향’과 경계짓고 있다. 우리가 ‘고향’을 보려 하면 반드시 ‘타향’과의 경계를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다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 아닌 것’과 함께 있다. 나를 보자. 나는 하나의 어떤 것--한 사람--이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나 아닌 것’과 구분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렇다. 그런데 앞서 말한 ‘고향’처럼 ‘고향’은 ‘타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타향’ 없이는 ‘고향’도 없다. ‘타향’은 ‘고향’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고향’을 볼 때, ‘타향’과 함께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하나의 ‘고향’을 보면서 ‘타향’을 함께 본다. 세 가지 보아야할 것 중에서 둘을 찾은 셈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향’과 ‘타향’이 결코 떨어질 수 없음을 통해, 이제 고향과 타향이 하나가 된 ‘고향(타향)’을 볼 수 있다. 그런가? 만약 보인다면 잘못된 것이다. 다시 해보자. “나는 고향이 ‘밀양’이다.” 그러면 ‘타향’은 ‘밀양’ 아닌 곳 전체이다. 지구상에서는 물론, 은하계, 우주전체 어느 곳이건 ‘밀양’ 아닌 곳 전체가 ‘타향’이다. ‘고향’인 ‘밀양’과 고향이 아닌 (타향)이 합쳐진 ‘밀양(타향)’을 보자. 결코 보이지 않는다. 볼 수가 없다. ‘타향’과 하나가 된 ‘고향’은 이제 더 이상 ‘고향’이라고 할 만한, 다시 말해서 ‘무엇’이라고 할 만한 경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그 결과를 ‘전체’라고 부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전체는 부분의 집합인데, 이 경우에는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부분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고향’, ‘타향’이 그것이다. 그러나, 부분은 서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고향’, ‘타향’은 서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다시 보자. 나를 보며 셋을, 반드시 셋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나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나를 보니 남이 보인다. 그리고 나와 남이 하나가 된 ‘우리’가 보인다. 여기서 또 ‘착각’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속 좁게 ‘우리 고향 사람’끼리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우리’로 하면 되지 않는가?” 물론 그런 ‘우리’는 우리가 보아야 할, 볼 수 없는 ‘우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인류전체’를 ‘우리’로 하면 되지 않을까? 역시 아니다. 그렇게 하면 그 ‘우리’는 ‘인류전체’를 우리에 가둔 ‘우리’이지, 결코 ‘인류’를 ‘인류 아닌 것’과 함께 묶는 ‘우리’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흙에서 나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흙을 떠난 적이 없다. 흙에서 흙과 함께 흙을 산다. 우리가 바로 흙이고 대지이다. 땅과 하늘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땅’이다. 내가 ‘우리’이고 ‘우리’가 ‘하늘땅’이다. 나는 가장 큰 하나와 하나이다. 이제 나는 가장 작은 하나와 하나이며, 가장 큰 하나와 하나이다. 물론 그 나는 이미 ‘나 아닌’ 나와 하나이다. 무엇일까??? 孔子는 ‘참된 고향(?)’을 찾아서 길을 재촉하라고 한다. ‘참된 고향’을 알아야 하고 ‘고향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라고 한다. 그것이 人生의 보람이고 기쁨이라고 한다[學而時習之, 不亦悅乎?]. 그러면 老子는 펄쩍 뛴다. “무슨 소리야.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타향에서 떠도는 거야! 비워, 비워! 그리고 고요함을 벗삼아 보게[致虛極, 守靜篤!]” 나는 두 길이 한 길임을 말하고 싶다. 두 분 할아버지를 뵈었다: “고향에 온 걸 보니, 자네 눈이 열렸군!” “나야말로 눈 뜬 장님이로세. 평생 살면서도 모르고 있으니......” 두 분이 제비인가 보다!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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