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 《道德經》 硏究 (二) / 朴 正 根 Ⅳ. 순간․영원, 상(常)․무상(無常)

필부 2007. 11. 19. 12:21
 

老子 《道德經》 硏究 (二) / 朴 正 根 Ⅳ. 클로드 모네(Claud Monet, 1840-1926) - 순간․영원, 상(常)․무상(無常) - 인상주의란 19세기 후반기 동안 프랑스에서 발전했던 회화의 한 유파에 주어진 이름이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느낀 인상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회화적 체계’를 가리킨다. 그리고 인상주의 미술가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규칙에 구애됨이 없이,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느낀 인상에 따라서 대상을 재현하려 하는 화가’이다.21) 나는 클로드 모네의 몇몇 작품을 읽어-봄에 있어 인상주의에 대한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비판-- “눈 밖에서만 무엇을 찾으려 하지 신비스러운 두뇌의 중심부에서는 아무 것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22) --에 ‘과연 그런가?’하는 의문을 던지며,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비평에 구애됨이 없이 내 자신이 느낀 인상에 따라서 대상을 재현하려 하는 화자(話者)’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 인상주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것들이 비록 지난날의 것이라고는 하더라도 적지 않은 경우에 찬사와 비난 양편이 모두 ‘신비스러운 두뇌의 중심부는 잠든 채 단지 눈으로만’ 보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물론, 어떤 류의 비판--화가들은 이제 인상을 있는 대로 소박하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인상주의를 실행하려 한다.” 즉 순수한 인상보다는 기법이나 이론에 보다 크게 비중을 둔다--23)의 성실함과 공정함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대상에 붙어사는 기생충들(즉 인상주의자들)은 ‘단지 시각의 밭에서만 예술을 경작하며, 그것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24)라는 류의 비난은 서까래를 고치려 기둥을 자르는 것과 다른 점이 있을까? 다른 한편, 모네와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들 역시 모네가 추구했던 것의 핵심을 비켜 가거나 가벼이 여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빛의 법칙을 분석하는데 대단한 매력을 느꼈던 모네는 자신의 모든 그림에서 빛을 진정한 주제로 다루어왔으며, ... 그의 작품이 갖는 특징은 바로 이러한 원칙에 따른 결과이며, 이를 가리켜 ‘태양광선의 변화양상을 탐구하는 방식’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 물을 그리는 데도 모네에 견줄 화가는 없다. 연못, 강, 바다를 각각의 색채나 농도, 흐름 따위를 각기 달리해 표현하는 법도 그는 알고 있다. 그런 다음 그것들의 덧없는 한순간의 ‘삶’을 정확히 고정시킨다”25)고 하는 식의 것들이 그렇다. 물론 모네가 빛과 색체의 변화와 분석 등에 깊이 주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다음과 같은 모네의 토로(吐露)는 모네의 시선이 그것들을 너머 훨씬 깊은 곳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 나는 미지의 실체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현상을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한 일체화된 현상과 같은 경지에 있는 한 우리는 실체에서, 아니 적어도 우리가 알 수 없는 그것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다만, 우주가 나에게 보여주는 것을 보고 그것을 붓으로 증명해 보이고자 했을 뿐입니다.26) 이와 함께 “우직한 정관자(靜觀者), 사물에 내재한 생명과 자신의 위대한 열정을 상통시키는 자”27)라고 한 모네에 대한 인물평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나누는데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가 모네에게 보여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법안종의 선사 현사사비(玄沙師備, 834-908)의 일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현사 스님은 대중에게 강론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마침 그가 법상에 올랐을 때, 밖에서 제비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실상(實相)에 관하여 이 얼마나 심오한 설법이며 법문인가!28) 그리고는 그는 마치 자신의 설법이 모두 끝난 양 법상에서 내려왔다.”29) 여느 봄날 제비의 지저귐은 아무 일도 아니다. ‘천국으로의 먼 길’을 힘들게 재촉하는 사람에게 봄날의 제비소리는 사소한 일상을 넘어 귀찮게 마저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법안(法眼)’의 이 스님에게 그 제비 소리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말씀’30)으로 보이고, 그 말씀으로 하느님을 듣는 일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스님의 법안이 ‘법이(法耳)’와 함께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제비 소리를 제대로 ‘보는’ 귀를 가졌으니 말이다. 그날 아침! 아침 안개 속에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있는 르 아브르 항구를 멀리 바라보다가 모네는 그 한 순간 무엇인가를 힐끗 보았음에 틀림없다. 모네가 본 것이 현사 스님과 대등한 것인지의 여부는 논외로 치더라도 그의 작품, <인상, 해돋이>(1873)에는 스님에게 들린 ‘제비의 지저귀는 소리’가 배어 있다. 노저어 가는 배와 출렁이는 물결, 물결에 흔들거리는 떠오르는 해의 붉은 반사광이 일순 정지된 순간 그 정적(靜寂)에 영원의 소리가 물들었다. 정적이 바로 영원의 소리이다. 그 정적은 ‘제비 소리’와 함께 있고 ‘제비 소리’를 담고 있다. 모네는 줄기차게, 지워지지는 않으나 아물거리는 ‘그 인상’을 되살리려고 했던 것일까? 그의 대부분의 작품 안에서 모네는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는 이중성--실재와 그림자(특히 물결이 이는 물에 비친 그림자)․ 흐름[動]과 정지[靜]․순간과 영원․실체와 변화--을 동시에 주목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문제처럼 이런 이중성은, 그것들간의 대립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함께 우리의 삶--존재--을 이룬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어디에서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에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삶의 모순은 일상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우리는 그런 모순과 혼란․대립․갈등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이것 또한 모순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들의 실존적 목마름이고, 이 목마름에서 갈증을 푼 사람은 몇 사람이나 될지? 그래서 우리들 거의 대부분이 참된 삶을, 삶의 진실을 치열하게 --심지어는 멍청한 가운데도-- 찾아 헤맨다. 모네 또한 진실을 찾아 갈 길을 재촉했음에 틀림없다. 그의 작품 <지베르니에서의 뱃놀이>(1887년경)에서는 강물이 낚시하는 세 처녀들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 아주 일상적인 삶의 한 모습이다. 이 작품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림 안에서 보트에 타고 있는 세 처녀와 보트는 물 표면을 거울로 삼아 그들의 그림자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 모네는 보트 위의 세 처녀를 그리며 자신에게 반문했다. “이 세 처녀는 무엇인가? 저기 강물 위 보트 위에 내가 그리는 세 처녀가 실제로 있다, 실재한다. 내가 그리고 있는 이 세 처녀는 저 처녀들의 그림(자)일뿐 실재(實在)가 아니다.” 모네는 이제 물에 비친 세 처녀의 그림자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물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저기 내가 바라보는 강물에 실제로 그림자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그림에 담고 있다. 내가 그리는 그림자는 실제 그림자의 그림(자)이다. ...” 우리들이 모네의 작품을 보듯이 모네는 자기 작품을 보며 생각했다. “여기 ‘그림 안에서’ 보트 위의 세 처녀는 ‘실제’로 낚시를 하고 있고, 그 모습이 강물에 비치어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림자마저 그림 속에 실제로 있다. 그런데 아까 실제로 낚시를 하던 실재했던 세 처녀는 이제 가버렸다. 그들은 이제 그곳에 실재하지 않는다. 도대체 실재함이란 무엇인가? 존재함--삶--의 진실은 무엇인가?” 모네는 작품 <인상, 해돋이>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 그가 받았던 ‘그 인상’을 더듬으며 그것을 보고 그리려 몰두했다. 모네의 작품 거의 모두에서 우리는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모네가 바라던 것을 이루었는지는 이제 그의 작품을 통해서 물을 수 있다. 나는 모네가 그의 갈증을 풀었었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그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가 삶의 마지막까지 “그릴 수 있는 그림은 ‘참-그림’이 아니다[畵可畵, 非常畵]”라는 화두를 두고 끊임없이 질문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만으로도 이 순수한 화가의 예술적 혼은 ‘고향’의 품에 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