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불교의 입장 / 김용표 2. 종교 배타주의, 포괄주의, 그리고 다원주의

필부 2007. 9. 9. 16:14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불교의 입장 / 김용표 2. 종교 배타주의, 포괄주의, 그리고 다원주의에 대한 검토 새로 전개되고 있는 대화의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 불교를 비롯한 인류 종교사가 보여 왔던 배타주의와 포괄주의, 그리고 다원주의 패러다임의 특성에 대해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종교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종교의 절대진리화 작업에 몰두해 왔다. 자기 종교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으며 다른 종교에서 궁극적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이른바 배타주의(exclusivism)에 대한 확신이 대부분 종교의 근본 입장이었다. 따라서 다른 신앙은 필연적으로 구원의 진리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단순한 신앙 논리는 사회적으로는 ‘너와 나’를 나누는 이분법적 태도로 나타나게 되고 자기 우월주의(ethnocentrism)에 빠져 타종교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의식을 갖게 되고, 미움과 갈등을 일으켜 심지어는 전쟁까지 서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종교 배타주의가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배타적인 교리나 감정에 기인되어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이익 집단화하려는 비종교적인 아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또한 배타주의는 이원적(二元的)인 교리 체제를 지닌 종교나 유일신교(唯一神敎)에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러한 교리 체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셈족의 종교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이들은 타종교를 우상 숭배나 이단으로 쉽게 비하시킨다. 배타주의의 유형은 ‘예수 중심 배타주의’나 ‘교회 중심 배타주의’ 또는 유태인의 ‘선민 사상’이나 이슬람교의 ‘마지막 예언자 사상’ 등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어떤 형식의 대화나 협력도 불가능하게 된다. 배타주의보다는 완화된 입장으로 종교 포괄주의(inclusivism)가 있다. 이는 자기 종교의 우월성과 구원의 최종성을 말하면서도 타종교의 진리성과 구원의 가능성을 일부 인정하는 입장이다. 또는 자신의 종교가 다른 모든 종교적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입장은 다른 종교의 진리를 배척하지 않으며 자신의 종교 속으로 끌어들여 이해하려 한다. 즉 자기 우위의 입장에서 타종교의 가치와 효용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동양의 전통 종교들은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종교 포괄주의는 타종교를 이해하려는 관용적 태도를 지닌다는 점에서 배타주의와 반대 입장이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 종교의 궁극성과 최종적 구원 논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배타주의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최근에는 가톨릭을 비롯하여 자유주의 신학 계열의 개신교에서도 여러 형태의 포괄주의적 사상이 나타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한 현상은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 배타주의 신조에 대한 문제 의식의 자각이라 보여진다. 칼 라너(Karl Rahner)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면서도 신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익명의 기독교도(anonymous Christian)’라고 보는 기독교 포괄주의를 말하고 있다. 즉 비기독교인도 이교도로 여기지 않고 언젠가는 기독교의 구원으로 완성될 잠재적인 기독교 신자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포괄주의는 결국은기독교에만 최종의 구원이 있다는 점에서 불교적 포괄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불교 포괄주의는 다른 종교의 진리를 배척하지 않으며 타종교를 불교 속으로 수용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불교 포괄주의는 절대 진리에 대한 개념 자체를 해소시킴으로써 진리 주장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데 반하여, 기독교 포괄주의는 자신의 절대 진리 사상을 높은 위치에 올려놓고 관용을 베푸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종래의 배타주의보다는 발전된 것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포괄주의는 종교 다원주의를 향한 예비적 이론이 되고 있으며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을 위해 배타주의보다는 한 걸음 진보된 이론으로 평가 할 수 있다. 그러면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를 넘어서 현대 종교의 새 패러다임으로 대두되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가 지향하는 바를 살펴보자. 종교철학적으로 다원주의라는 용어는 각 종교가 동등하게 구원의 길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이론이다. 또는 종교적 진리가 한 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원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론이며, 사회적으로는 여러 종교의 정치적, 사회적 평등성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종교 다원주의 사상가 존 힉(John Hick)은 《신은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God Has Many Names)》에서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은 ‘하나의 궁극적 실재(the one ultimate reality)’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종교가 근본적으로 ‘하나의 종교’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어떤 것이 참된 종교인가 하는 물음은 적절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는 ‘예수 중심적 모델’에서 신앙의 보편적인 모델인 ‘신중심적 모델’로 전환하는 종교의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신적 실재(神的 實在)’를 중심으로 세계 종교의 동질성을 파악하려는 입장도 이러한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불교와 같은 종교에는 해당되지 않게 된다는 비판을 의식한 그는 1981년부터는 ‘신적 실재(神的 實在)’ 대신 ‘실재(Reality 또는 the Real)’라는 모델의 제시를 통하여 ‘실재 중심적 패러다임’을 주창하고 있다. 또한 그는 종교적 숭배나 묵상, 체험의 대상이 되는 실재를 ‘영원한 일자(the Eternal one)’라는 용어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2) 그렇다면 세계 종교는 왜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가 하는 본래의 질문이 남아 있다. 존 힉은 여기에 대해, “종교적 신앙은 우리의 삶과 분리된 어떤 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지리, 기후, 경제적 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간의 문화,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변한다. 그러므로 존 힉의 종교 사상은 기독교의 배타주의와 동양적 포괄주의까지 모두 비판하며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레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도 《종교 내의 대화(Intrareligious Dialogue)》에서 세계 종교를 무지개로 은유하고 있다. 즉 서로 다른 종교 전통은 신적 실재(divine reality)라는 순백의 광선이 인간의 경험이라는 프리즘에 투과되어 나타나는 무수한 색깔과 같다는 것이다. 그 광선은 종교, 전통, 교리 등을 통해 굴절된다. 예를 들면, 녹색이 황색이 아니듯이 힌두교는 불교가 아니지만 우리는 그 색상을 바라 볼때 어디에서 황색이 끝나고 녹색이 시작되는지 그 경계를 잘 알 수는 없다. 그 빛깔의 경계는 잘 알 수 없으나, 어떤 특수한 빛깔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 백광(白光)이라는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실재는 많은 이름이 있으며 각 이름은 불이(不二)의 신비 자체를 가르친다. 이 신비는 궁극적 종교의 요소로서 교리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곳, 어떤 종교에도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여러 종교 다원론자들의 견해는 논하는 차원은 다르나 상대적인 가운데도 모든 세계 종교는 공동의 본질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다원주의 사상은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에 종교간의 대립이나 갈등이 있을 수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