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을 보며 山이 있었다. 잔설(殘雪)이 골을 메우고 겨울안개가 입김처럼 부끄럼타는 산의 얼굴을 가린다. 산 마을은 山이 좋아 산기슭에 옹기종기 앉았다. 하얀 연기라도 솟으면 다정(多情)해 보이련만 아궁이를 없엔터라 굴뚝조차 없다. 山도, 나무도, 산마을도 모두 동작을 멈춘 채 눈을 감고 있다. 그렇게, 침묵에 익숙하기만 하다. 잡목들은 낙엽 같은 메마른 잎새를 헌 옷처럼 찬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가을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가 보다. 발목을 잔설(殘雪)로 덮고 숲은 빈손을 흔드는 나목(裸木)들과 말라버린 잎새를 걸치고 추위를 타는 활엽수들이 어깨를 기대고 있다. 그 사이로 침묵을 찬바람이 밀어낸다. 가도, 가도 山뿐이다. 山 때문에 하늘만 높다. 꽃잎을 제치듯 山을 열고, 나는 다시 山으로 간다. 나는 山에 안겨, 그 山을 보듬는다. 무주(茂朱)를 가는 국도(國道)에서 끌쩍거린 메모紙다. 산자락을 밟으며 또 다른 山을 향한다. 모든 게 하나의 山인데 나 혼자 다르게 구별하는지 모른다. 情이란 사랑이라는 말로써, 이 山과 같으리라. 戀情이면 어떻고 思慕면 어떠하리! 말 없이 느껴지는 체취 같은 사랑은 은은해서 좋다는 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듯 마음으로만 여백을 채워라 하시는 님. 그러나 情은 애착도 있고 소유도 욕심내는 법. 다만 허락이라는 넓이의 제한을 감내해야 한다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 좋은 것은 좋아하며 살수는 없는 일일까! 가슴에 잠시 품었다가 내려놓는 게 情은 아닐 진데 마음가는 데로 가라 하며 살수는 없는 걸까? 후기: 눈이 덮여 설국(雪國)이다. 길이 사라졌다. 떠날채비를 할 필요가 없다. 이미 길과 들이 하나이기 때문에 탈출구를 잃어버린 까닭이다. 햇살이 눈이 부시다. 찬란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젔다. 글 한 편 쓰려다 옛날 잡기장에서 겨울 산을 끄집어낸다. 눈 속에 파묻혀 순백으로 탈색되고 싶다. 그냥 눈이 되고 싶다. 그 누가 있어 순수로 펼쳐진 풍경에 물감이라는 감정을 떨구어놓을 수가 있겠는가! 2000.2.3 영산강이라 이름지어진 내가 있고 그 둔덕에 눈이 덮혀 흰 천을 깔아놓은듯 싶다. 純白이다. 정갈하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창가에서 밖의 겨울 풍경을 보며 마음에 지워버린 기억들을 끄집어 낸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쓸데 없이 가슴 아리게 하는 아픔들을 되찾아내는 걸까. 내가 내 마음을 알 수 없는데 누구의 심사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光州는 온통 눈나라이다. 나는 눈 사람이 되어 이내 녹아버릴 것이다. 무엇이 남겨질 것인가. 오늘 전주에서 무주를 넘어가며 느꼈던 막막함을 되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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