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 죽음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생각 / 강신표 -한국 전통사회의 대대문화문법

필부 2006. 6. 27. 17:19
 

죽음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생각 / 강신표 한국 전통사회의 대대문화문법 한국사회의 밑바닥에는 한국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 그것은 한국인이 오랜 역사적 시간 속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오면서 쌓아 온 생활양식이다. 한국인이 사용하는 언어로부터 생존을 위한 농사짓는 법이며 하늘과 조상에 바치는 제사, 희로애락을 함께하면서 생로병사의 과정 속에서 축척된 모든 지혜가 생활양식 속에 베어 들어있다. 최근 수십 년 간 우리가 경험한 총체적 사회변화 속에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지던 생활의 지혜가 더 이상 의미 없고 소용없는 그 무엇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농사를 중심으로 한 생업은 어느 듯 상공업 중심의 생업으로 바뀌었고, 농촌 마을에서 살던 사람들이 대도시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친족중심에서 직장중심의 인간관계로 우리 삶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변화의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밑바닥에는 아직도 과거 우리 조상들이 살아왔던 생활방식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대도시 아파트에 살지만 옛날 시골 장터 같은 노점상이 아파트 주변에 펼쳐지고, 친족간의 왕래는 큰일을 만날 때 마다 다시 재활성화 되곤 한다. 사람들의 오래된 생활방식은 하루아침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문화적 전통이다. 우리의 이 문화적 전통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본인은 두 가지 역사적 배경을 주목하고 있다. 첫째 한국인은 농경사회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점과, 둘째 중국의 한자(漢字)문화권 속에 살아왔다는 점이다. 농경사회는 농사를 짓는데 여러 사람들의 힘을 모아서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차적으로는 가족과 친족이 함께 일하고 다음으로 이웃해 살고 있는 동리사람들이 품앗이로 서로 도와야한다. 농사는 무엇보다도 자연의 절기와 환경에 순응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과학 기술문명으로 조성된 현대 상공업 사회는 끊임없는 도전과 모험을 위주로 하는 사회이어서 농경사회와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자연환경에 순응하는 것이 기본인 농경사회에서는 인간관계도 서로 간에 순응하며 안정적 조화를 최우선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현대사회는 성원들 서로 간에도 적대적 경쟁관계 속에서 살아야한다. 그래서 끝없는 긴장과 대립 속에서 계약적인 법률적 조정을 통해 서로 간에 분업을 지속하는 하는 것이다. 가족적 인간관계는 농경사회의 근간을 이룬다. 가족단위를 넘어서는 친족관계도 가족관계의 확대요,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는 지연 집단도 가족관계로 확대되고 있고, 나라 전체가 국가(國家)라는 표현 속에 가족을 뜻하는 집 가(家)자가 들어갈 정도로 가족관계의 확대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집안에 어른이 있듯이, 마을에도 어른이 있고, 나라에도 어른이 있어야한다. 어른은 그가 거느린 사람들을 단속하고 인도해야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여기에는 어른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회제도적 장치가 있게 마련이다. 효와 충이라는 유교적 이념은 바로 이러한 사회제도적 장치를 뒷받침하는 근간이다. 일년을 단위로 하는 연중행사에는 설날과 추석 등에 조상님들에게 가족과 친척이 모여 합동으로 조상숭배의 제사 의례를 통해 서로 한 핏줄의 후손이라는 집단의식을 재확인하기도 한다. 제사 의례에서 누가 어떤 순서로 절을 올리느냐에 따라 서로 간에 위계 서열을 재점검하기도 한다. 집단성과 위계적 등급성은 가족생활의 눈에 보이지 않은 문화문법이다. 농경사회의 가족생활에 내재한 문화문법은 현대 산업사회의 가족생활에서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가족집단에서 비롯된 문화문법은 가족집단을 넘어선 여러 사회집단에서도 소속집단의 경계를 따지고, 집단내의 위계적 등급을 따지며 살아가고 있다. 소속집단의 경계를 따진다는 말은 상대가 같은 집안사람인가, 같은 고향사람인가, 같은 학교 출신사람인가, 같은 회사사람인가 등을 따지는 의식을 말한다. 위계적 등급을 따진다는 것은 가족관계에서 누가 손윗사람인가, 학교 선후배 사이에서 누가 선배인가, 누가 나이가 많은가, 누가 직장 선배인가 등을 따지면서 등급의 상위에 있는 사람은 하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대접 받을 것을 기대하는 문화문법이다. 여기 한 가지 더 추가되는 문화문법의 규칙이 있다. 집단성과 등급성을 잘 지속하기 위해 때로는 “연극/의례성”이 발휘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럴 수도 있지!”, “없던 일로 합시다.”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닌가뵈?!” 등의 표현이 사용되는 문화문법이다. 이러한 문화문법을 통 틀어서 ‘우리주의’ 또는 ‘가족주의 문화’라고도 하나 본인은 이러한 한국전통 문화문법을 “대대적 문화문법”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한국전통 문화문법을 “대대적 문화문법”이라고 풀이하는 근거는 한국 전통사회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한자문화권의 일환으로 파악해야한다는데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문화」의 「문」자도 원래의 뜻은 문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문양과 일맥상통한다고도 보겠다. 나는 조선전통문화의 문법을 이러한 한문자에 내재하는 '음양적 원리에 입각한 대대(對待)적 인지구조'라고 정의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대대적 문화문법'이라고 규정해 보았다. 대대(對待)는 for와 against라는 pro-con의 개념이다. 즉 相「對」하고 反「對」하는 對이요,「待」遇하고 期「待」하는 待이다. 어쩌면 시(是)비(非)의 논리의 세계이다. 이는 곧 음과 양의 이분법적 「對」의 개념이요, 음과 양의 「待」의 화합으로 만물을 화생시키는 개념이다. 대대는 바로 이 상보적 음양의 작용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대대적 인지구조는 레비-스트로스가 말하고 있는 인간사고의 기본구조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을 “서로의 짝”으로 보는 것은 이러한 한자문화권의 대대적 문화문법에서 비롯되는 풀이가 가능하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남녀노소”라고 일컫는데도 남녀를 짝으로 설정하고, 이어서 노소를 짝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다시 사람의 일생을 “생노병사”로 보든가 아니면, “관혼상제”의 통과의례로 보는데 서도 “서로의 짝”의 개념은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사람은 태어나서 늙는 것이오, 병들어 죽는 것이다. 어른으로 관례를 치르고 혼례를 치러야 하고, 죽으면 장례를 치러야하고 이어서 자식들은 매년 제사를 올리며 죽은 이를 잊지 말아야한다. 서양 그리스 신화에는 제우스 신의 아버지 크로노스 신은 자기 부인이 자식을 낳으면 낳는 족족 잡아먹어버린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부인은 마지막으로 낳은 제우스를 숨기고 갓 난 짐승을 대신 먹게 하여 제우스를 살린다. 뒤에 장성한 제우스는 어머니로부터 자기 형들과 누나들을 모두 아버지가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죽이고 아버지 뱃속에 있던 오누이들을 살려낸다. 이 신화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생존(being)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하는 가를 말하고 있고, 앞선 세대는 죽어야(dying) 새로운 세대의 시대가 열린다는 뜻도 함의하고 있다. 사람은 부모로부터 태어난다. 그리고 부모는 자식의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죽어야한다. 죽지 않으려 한다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그리스 신화다. 우리의 문화전통에서 본다면 이 서양 그리스 신화는 너무 끔찍하게 들린다. 그러나 “세대는 변해야한다”는 사실은 동서양이 차이가 없다. 부처님도 “제행무상”이라고 하였고, “생주이멸”이라고도 하였다. 우리의 문화전통에서 죽음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의 “위상”을 달리한다. 세상을 떠났으므로 “신적인 존재”가 된다. 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지내면서 죽은 자는 산자 사이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이러한 통과의례는 한국인에 있어서 중요한 사회적 의례로 손꼽힌다.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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