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불교의 만남 / 김종욱- 3. 산은 산이 아니다 2) 불교의 공(空)

필부 2006. 6. 10. 17:19
 

 

하이데거와 불교의 만남 / 김종욱

 

3. 산은 산이 아니다

2) 불교의 공(空) 불교적으로 볼 때, ‘산은 산이 아니다’라는 말은 ‘산은 자성적으로 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소위 반야의 통찰에 의해 얻어진다. 반야(般若)란 산스크리트 prajn?片?음역한 것으로서 ‘지혜’라는 뜻인데, prajn?愎?‘앞선’ ‘넘어선’을 뜻하는 pra와 ‘안다’는 뜻의 jn?彭?결합되어 ‘분명히 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반야란 단순히 일상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선 것이고, 그렇게 넘어섬으로써 오히려 더 분명하게 아는 것이라는 점이다. 전자는 반야가 개념적 분별을 넘어선 직관적인 통찰이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반야란 있는 그대로를 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 yatha?hu?a-jn??a-dars첺na)이라는 의미이다. 분별을 넘어선 직관이기에, 반야는 주객 분리의 이원적 사고가 극복된 무분별의 지혜(無分別智)이며, 그런 무분별적 불이(不二)의 집중(sama?hi, 三昧, 定)을 통해 주어지는 근본적인 체험이다. 또한 반야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연기(緣起)의 원리에 따라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 것으로 본다는, 일체법에 대한 연생적(緣生的) 통찰을 의미한다. 즉 반야의 시야 한가운데서 일체법의 총체적 모습이 무상과 무아의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공(空)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며, 이 공이 바로 자성(自性)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앞서 설일체유부의 입장을 자성 개념을 중심으로 소개했는데, 이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공박한 반야계 경전들을 신봉한 용수(Na?a?juna, 龍樹)의 중관학파(中觀學派, Ma?hyamika)에서는, 초기 불교의 기본 정신인 연기설에 근거하여 설일체유부의 입장을 역설적으로 해체하였다. 용수는 설일체유부의 자성(自性, svabha?a)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자성이란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을 의미하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성을 가진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생긴 것이 아닌 것이며, 원인을 갖지 않는 것이고, 영원한 것이다.” 즉 설일체유부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항상하며, 그 자신 다른 것에 의존함이 없이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본체라고 주장한 자성이란, 곧 연기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 된다. 용수가 볼 때 자성이란 마치 붓다에게서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개념처럼 또 하나의 형이상학적 개념에 불과했으며, 연기한다는 것은 곧 모든 다르마들이 상관적이라는 것, 즉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무자성의 다르마들은 그 자체의 궁극적 사실이 아니라 단순히 상상된 것이고, 헛되이 분별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설일체유부가 비록 연기는 하지만 다르마들은 자성적으로 실재한다고 본 데 반해, 용수는 바로 연기하기 때문에 다르마들은 무자성이라고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연기이므로 무아이듯이 연기이므로 무자성이고, ‘무상이므로 고정적 지속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기 불교에서 반야적 지혜의 내용이던 무상과 무아가 이제 대승불교의 개시와 더불어 무자성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성이 없음을 일러 공이라고 한다. 자성의 텅빔, 자성에 대한 전면적 부정, 그것이 공(空, s쳕?ya)이다. 연기한 모든 것에 자성이 없으므로 일체는 모두 공이다(一切皆空). 이렇게 자성을 부정하여 ‘공을 설하는 목적(空用, s쳕?yata prayojana)’은 희론의 적멸에 있다. 희론(戱論, prapan?a)이란 문자 그대로 허위의 쓸모없는 이론을 말한다. 이처럼 지혜를 얻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희론이란, 자성을 상정함으로써 일어나는 사유 구성, 혹은 결정화되고 대상화된 분별(vikalpa), 한마디로 자성적 분별심을 뜻한다. 이것은 ‘자성을 갖고 있지 않은 모든 것에 자성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으로서, 연기하는 역동적 과정을 개념(na?a, 名)과 형상(nimitta, 相)으로 고정화시키거나, 주관(gra?aka, 能取)과 객관(gra?ya, 所取)의 도식으로 이분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분별하고 나서는 그렇게 분별된 것이 있다거나 없다라는 양자택일적인 판단을 내린 다 음, 그 극단적인 판단 내용의 어느 하나에 집착하게 된다. 이런 식의 판단에 대표적인 것으로 생(生)과 멸(滅), 상(常)과 단(斷), 일(一)과 이(異), 거(去)와 래(來) 등이 있다. 그러나 무수한 조건과 조건들 사이의 상호 작용하는 모습을 각 측면에 따라 이렇게 ‘생이다’ ‘멸이다’는 등의 여덟 가지로 나누지만, 그것들 자신이 어떠한 자성도 지니고 있지 못하므로 확정적으로 단정지을 만한 생과 멸의 상(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생과 멸에는 애당초 자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을 부정하면 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이 부정되므로 멸 또한 부정되어 불생 불멸이 된다. 따라서 연기한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어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래불거한 것이므로(八不), 양극단의 어느 하나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中道)이다. 자성을 세워 분별한 다음, 그것에 집착하여 온갖 쟁론을 일으키지만, 원래 무자성이므로 분별할 것도 집착할 것도 쟁론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자성(無自性, nih.svabha?a)이어서 무분별(無分別, nirvikalpa)이고 무집착(無執著, anabhinives첺)인 중도에 설 때, 희론은 종식된다. 불교적으로 볼 경우, 반야에 의해 직관된 공은, 상호의존적 연관관계인 연기의 역동적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자성을 상정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이데거적으로 볼 경우, 불안에 의해 경험된 무는,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원초적 발현 사태 속에 담긴 존재와 존재자의 비은폐적 교호 관계를 망각할 때, 존재자성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연기의 실상에 대한 불각(不覺)으로 생겨난 자성은 자기 존재의 고립성과 지속 존재의 항유성을 지닌 것으로서, 개념과 형상이라는 고정화와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분화를 통해 일체법을 분별하는 태도로서 나타난다. 이런 분별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그것을 얻고자 하는 소유를 유발한다. 아울러 존재의 진리에 대한 망각으로 생겨난 존재자성은 영속적 현존성을 지닌 보편적 본질이나 존재자의 가능 근거로서, 형이상학의 역사의 시기마다 이데아, 실체성, 신적 현실성, 주체성 등으로 나타난다. 주체성과 대상성을 본질로 하는 표상은 항존하는 존재자성을 자신의 의지대로 존재자를 처리할 수 있는 장악 가능성의 근거로 삼아, 일체를 몰아 세우고, 이런 식의 대상화는 존재자 전체의 부품화로 귀결되고 만다. 그러나 연기의 실상을 정각(正覺)할 경우, 본래 자성이 없는 것이므로 분별하여 집착할 만한 것도 없고, 얻어서 소유할 만한 것도 없는 것이다. 또한 존재의 진리를 회상할 경우, 진상은 존재자성에 담기지 않는 것이므로 대상적으로 표상하여 처분하려 하거나, 장악하여 지배하려 하거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결국 무자성으로서의 공이 무분별과 무집착과 무소득(無所得)으로 이어지듯이, 비존재자성으로서의 무는 표상 불가성과 처분 불가성과 장악 불가성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이제 더 이상 산은 자성과 존재자성으로서의 산이 아니다. 산은 분별과 집착과 소유의 대상, 표상과 처분과 장악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산은 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