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에게 밝고 애정 어린 감사의 말들을 속삭여 주도록 한다. 자신에게 사납고 비판적인 마음이 들 때마다 의식적으로 따스한 마음으로 다독여 주도록 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보다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스스로도 기특하게 생각되는 자신의 장점들을 떠올려 본다. 그러면 타인의 단점이나 결함을 환히 궤뚫고 있으면서도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에게 모자란 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그에 상관없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삭티 거웨인의 "난 이미 새로이 거듭나고 있다." 中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남을 쉽게 허락하고 화해하면서 자신에게는 냉혹하리 만치 엄격한 사람과 자신의 허물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 보내면서도 타인의 잘못은 결코 놓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후자만을 탓할 뿐 전자에게는 양식과 인격이 있다는 이유로 겸손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호의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두 부류의 성향을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은 남에게도 관대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쉽게 허락하고 너그러워지는 까닭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기에 그 이유가 있다면 너무 앞질러 가는 생각일까. 자신이 아니라는 이유가 덜 심각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즉 내가 또 하나의 타인이고 그가 또 다른 나인 것을 망각한다는 말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그릇과 같은 것이다. 크기와 깊이에 따라 담아 둘 사랑의 양이 차이가 난다. 마음이라는 그릇에 담겨지는 것만이 사랑이다. 사람들은 사랑만 키우려는 것에 조급해 하고 열망한다. 허나 담을 그릇이 그만한데 마음을 키우지 않고 무엇을 더 담을 것인가. 마음도 넓히고 사랑도 키우는 일은 자기 사랑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남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이란 눈에 보이는 것에서, 가까운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른다는 말은 사랑이 없다는 말과 같다. 사랑이 없는 사람이 사랑을 안다거나 할 수 있다는 건 모순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나와 사랑을 시도한다. 나를 사랑하므로 나와 같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또 다른 나인 그를 사랑하므로 나를 사랑게 되기 위하여. 글이란 그런가 보다. 생각이 문자로 표현되는 것이니 글솜씨와 상관없이 내 생각이나 느낌이 나열되어 있다. 설익은 것이라 느껴진다면 그만큼 성숙해진 증거요, 다시 공감하게 된다면 나름대로 흐뭇해서 좋을 것이다. 어부림 초창기에 올린 글들을 정리하며 다시 올린다. 그렇다고 썩 마음이 들어서라기보다 그 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는 추억담기이다. 앞으로 몇꼭지 더 올려볼까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