散文

[스크랩] 내 주인은 어디에 있는가 / 안도현

필부 2006. 5. 23. 13:52
 

내 주인은 어디에 있는가 / 안도현 '희망전당포'는 오랫동안 천식을 앓고 있는 노인 같다. 가물거리는 형광등 불빛이 잦은 기침 끝에 가까스로 숨을 고르는 듯 희미하다. 요 며칠 사이 새로운 물건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은 진열대에는 먼지가 더께로 앉아 있다. 그래도 옛날에는 찬란했던 시절이 있었노라고, '희망전당포'는 과거의 영화를 되돌아보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이 전당포의 늙은 주인 전(錢)씨는 자정이 되자 덧문을 꼭꼭 걸어 잠근 뒤에 메추리알 같은 형광등의 스위치를 눌러 껐다. 주인 전(錢)씨가 방으로 잠을 자러 들어가면 전당포도 함께 잠이 든다. 그것은 '희망전당포'가 문을 열고 나서 30년 동안이나 되풀이해 온 일이었다. 그 동안 주인이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것은 이 곳에서 '희망전당포' 자신밖에 없었다. 전당포의 개구멍 같은 철망 사이로 들어와 맡겨진 물건들은 수시로 주인이 바뀌었다. 그 바람에 '희망전당포'는 때로 그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당신은 주인이 늘 가까이에 계시는군요." 진열대에 쌓인 물건 중에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음, 그렇긴 하지." 하고 '희망전당포'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하면서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늘도 주인 전(錢)씨가 불을 끄고 들어가자, 진열대에 놓인 물건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들의 주 화젯거리는 자신들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일까 하는 것이었다. 전당포에 맡겨진 물건들은 아무리 값이 나가는 것이라 해도 불안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려 간 사람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는 불안한 기다림이 계속되는 것이다. 약속한 날짜가 되어도 손님이 돌아오지 않으면 기다림은 체념으로 이어지고, '희망전당포'가 전혀 희망을 주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볼썽사나운 몰골로 하루하루를 견뎌야 하는 것이다. "내 주인은 틀림없이 돌아올 거야." 손목시계가 초침을 째각거리며 말했다. "나를 손목에 차고 다니던 그 사람은 중소기업의 젊은 사장이었어. 회사가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서 졸지에 문을 닫게 되고, 그래서 빚더미 위에 올라앉은 사람이지. 결국은 나를 여기에다가 맡겼지만, 그는 정말 능력 있고 견실한 사람이었지. 게다가 부부 금실도 얼마나 좋았다구. 신부한테서 나를 결혼 예물로 받았으니 나를 잊을 리가 있겠어? 내 주인은 보나마나 지금 회사를 일으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멀지 않아 그는 나를 찾으러 올 거야. 암, 그렇고 말고." 전당포에 들어온 지 1년이 넘었건만 손목시계는 여전히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매 시간 쉬지도 않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여기 맡겨진 귀금속치고 결혼 예물 아닌 건 별로 없다는 걸 모르는구먼. 결혼 예물이 소중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 오죽하면 우리를 여기에다 맡기고 돈을 빌려 갔겠어? 나도 황금빛으로 빛나던 결혼 예물이었는데, 나를 맡긴 아주머니는 남편하고 이혼을 한 뒤에 나를 여기에다 내다 버린 거야. 설혹 갚을 돈이 생겨도 그 아주머니는 나를 찾아가지 않을 걸. 나는 이제 주인이 없는 몸이야. 누군가 나를 손가락에 사랑스럽게 끼워줘야 말이지." 금반지가 핼쑥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용기를 잃지 말아야지. 기다리는 것은 언젠가는 오게 되어 있어.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야." 손목시계가 초침 소리를 더 크게 내며 말했다. 하지만 금반지는 여전히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 아주머니가 너를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할 건 없어." 진열대 한쪽 구석에 백발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수동식 타자기 한 대가 쿨렁쿨렁 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 전당포에 들어온 지 가장 오래 되는 고참이었다. 이제는 어디 박물관에나 가야 만날 수 있을 수동식 타자기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우리를 맡긴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주인은 당연히 이 전당포의 주인인 전(錢)씨가 아닐까. 나는 여기에 온 지 십 년을 훨씬 넘기면서 비로소 깨달은 게 있어. 기다림이란 너무 사치스럽다는 것을 말이야. 내가 지금 바깥에 나간다고 해도 나는 퇴물 취급을 받을 게 뻔해. 바깥 세상은 이미 컴퓨터가 모두 장악했다는 것을 나는 알지. 그런 곳에 가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는 여기 전당포가 편하고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들 주인이 언제 올 것인지 목을 빼고 기다릴 필요가 뭐 있겠어. 우리 주인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주무시고 계시잖아. 전(錢)씨 아저씨 말이야. '희망전당포'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 아마 그럴지도 몰라." 잠깐 눈을 붙이고 있던 <희망전당포>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였다. '희망전당포'는 갑자기 겨드랑이 쪽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전당포의 환기창이 달린 겨드랑이는 녹슨 쇠창살로 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그 쇠창살을 살금살금 뜯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소리를 죽이고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쇠창살을 뜯어내고 있는 그는 놀랍게도 도둑이었다. '도둑이야!……' '희망전당포'는 반사적으로 주인 전(錢)씨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 뿐 바깥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다. 전당포의 진열대에 놓인 물건들도 입만 뻥하니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전당포 안에는 주인 전(錢)씨가 코를 고는 소리만이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모든 것은 도둑의 뜻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노후한 쇠창살은 너무나 쉽게 뜯겨져 퀭한 공간을 만들었고, 도둑은 미리 예행 연습을 한 것처럼 날렵하게 전당포 안으로 몸을 던졌다. 두 사람이었다. '희망전당포'가 생긴 이후 처음으로 도둑이 든 것도 모르고 주인 전(錢)씨는 잠에 곯아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도둑들은 노련하게 현금과 귀중품이 들어있는 금고를 열었다. 금팔찌, 금목걸이, 금비녀, 금거북이, 다이아몬드, 루비...... 어둠 속에서 값나가는 귀금속과 보석들을 손에 닥치는 대로 쓸어 담는 도둑들의 손길은 민첩했다. 그리고는 한 점 소리도 남기지 않고 도둑들은 전당포를 빠져나갔다. '희망전당포'를 지키고 있던 대다수 물건들의 주인이 전씨에게서 도둑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 세상은 온통 도둑들의 것이야!' '희망전당포'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 보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목구멍 안에서 뱅뱅 맴돌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전당포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허전함이 그의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희망전당포'는 가까스로 정신을 추슬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당포 안은 바닷물이 빠져나간 쓸쓸한 갯벌 같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진열대에 몇몇 물건들이 남아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도둑이 들기 직전까지 쫑알쫑알 이야기를 나누던 손목시계, 금반지 하나, 수동식 타자기가 그들이었다. "휴우―" 그들도 삽시간에 일어난 일을 숨죽이고 지켜보다가 허탈해진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전씨 아저씨는 이제 망했어." 손목시계가 금반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까? 전씨 아저씨는 우리를 남에게 넘기거나 내다버릴지도 몰라. 그러면 우리들 주인은 또 바뀌게 되겠지?......" 금반지는 자신을 손가락에 끼워줄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듯하였다. "그래, 전당포가 문을 닫으면 우리도 곧 뿔뿔이 헤어지게 될 거야." 수동식 타자기의 목소리도 가라앉아 있었다. "내 주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서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주인이 누구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물건은 없었다. 손목시계를 맡기고 간 젊은 사장도, 금반지를 잡히고 간 아주머니도, 전당포가 털린 줄 모르고 잠을 자고 있는 전(錢)씨도 그들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남의 귀중한 물건들을 훔쳐 간 도둑은 더더구나 주인이 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손목시계가 말했다. "주인은 사랑하는 것을 버리지 않아." 금반지가 말했다. "주인은 사랑하는 것을 사고 팔지도 않지." 수동식 타자기가 말했다. "진정한 주인은 남이 사랑하는 것을 훔쳐서 주인 행세를 하지도 않지." 손목시계와 금반지와 수동식 타자기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외로웠으나 자기들의 주인을 기다려온 일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들의 운명을 거머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릴없이 기다렸고, 지쳤고, 그리하여 가까스로 자신의 내부를 돌아볼 시간을 갖게 된 것이었다. 주인은 어디 먼 데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 운명의 진정한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계를 움직이는 작은 톱니 하나하나, 금반지를 이루고 있는 금 알갱이 하나하나, 타자기의 손때 묻은 자판 하나하나…… 그것들이 모여 자신의 존재를 이룬다는 사실을 여태 모르고 살았다. 스스로를 주인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때, 그들은 모두 노예였고, 한낱 저당잡힌 물건들일 뿐이었고, 그래서 괴롭고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작지만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깊은 잠이 든 전당포 주인 전씨가 듣건 말건 상관 없는 일이었다. "내 자신의 주인은 나야!"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희망전당포'도 생애 처음으로 한 가닥 희망을 발견했다. "내 주인도 늙은 전(錢)씨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었구나!"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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