散文
잠이와야 잠을 자지!/ 이찬수 잠을 자다? 잠이 오다? “아, 피곤해! 잠이나 자야지!” 우리는 밤이 되면 잠을 잔다. 졸리니까 자기도 하고 졸립지 않더라도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우리는 잠 속으로 빠져든다. 과연 우리는 “잠을 자는 것일까?” 아니면 “잠이 오는 것일까?” ( 일상 언어 속에서는 이들을 흔히 같은 뜻으로 쓴다. 어떻게 쓰든 의사소통에는 별 지장이 없다. 그러나 “잠을 자는지 잠이 오는지”, 이 ‘말장난’ 속에 인생의 신비도 담겨있다. 무엇이 신비일까? 한 번 더 물어보자. 잠을 자는가? 잠이 오는가? ) 분명한 것은 잠이 오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자야겠다 싶어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잠이 오지 않으면 도대체 잠을 이룰 수 없다. 잠이 와야만 잠을 자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강변한다. 잠은 내가 자고 싶어서 내 스스로 자는 것이지, 그저 오기 때문에 자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자려고 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잘 수 있다고, 눈감고 3분만 있으면 영락없이 잠 속으로 들어간다고. 그러나 과연 언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어렵게 얻은 휴가를 이불 속에서만 지내기로 작정했다고 하자. 하루는 계획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틀까지도 이불 속에서 뒤척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삼일을 계속 잘 수 있을까, 사일을 계속 누워있을 수 있을까. 왜 그럴 수 없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잠이 않오기 때문이다. 실컷 자고 나면 저절로 눈이 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똑같은 이유에서이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오던 잠이 이제 그쳤기 때문이다. 오던 잠이 그쳤으니 눈이 떠질밖에. 그러니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야 할 밖에. 또 어떤 이는 잠이 오더라도 자지 않을 수 있다고 강짜를 부린다. 하루 이틀 그래보라지. 자지 않을 수 있나. 자지 않으려 해도 쏟아지는 잠 앞에서는 달리 할 도리가 없다. 그저 오는 잠을 맞이할 도리 밖에 없다. 눈꺼풀의 무게가 만근이라더니,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더니, 달리 생긴 말이 아니다. 이 마당에 “내가 잠을 잔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오는 잠을 맞이할 뿐이다. 잠은 왜 올까? 피곤하기 때문이다.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잠을 자라고 나의 몸이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지 않고서는 배겨날 도리가 없다. 그 말을 충실히 들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밥을 먹는다”지만, 그것도 몸이 밥을 불러들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무 때나 먹지 못한다. 아무리 대식가라도, 배가 터질 정도로 속에 음식이 차 있으면, 더 이상 먹지 못한다. 먹으려 해도 더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먹어야겠다는, 먹고 싶다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아무리 소식가라도 배 속이 텅 비어있으면 몸이 먼저 밥을 부른다. 그러면 밥 한 숟가락, 빵 한 조각이라도 먹어야 한다. 몸이 부르는데 따르지 않고서는 견뎌낼 재간이 없다. 이 마당에 밥인들 내 마음대로 먹는 것이랴! 내 마음대로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게 아니다. 먹을 수 있을만한 상황에서나 먹을 뿐이다. 아니 ‘먹히는’ 것이다. 몸이 요청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기에 그렇다. 인간의 의무란 알고 보면 별게 아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이다. 제대로 된 선사(禪師)들이라면 언제나 그런 식이다. 물 흐르듯 흐른다.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란 도무지 없음을 진작에 깨쳤기 때문이다. 아, 인간의 보잘 것 없음이여! 무엇인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던가. 언젠가부터 카페인에 약해졌다. 한번은 저녁때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신 탓인지 당췌 밤에 잠이 오질 않았다. 아무리 잠을 청하려고 해도 오지 않았다. “그냥 일어나 책이라도 볼까? 아니면 달밤에 체조라도 할까? 그랬다가는 내일 더 피곤할텐데, 잠자는 게 현명하지! 좀 더 누워있어 보자!” 그런데도 잠은 오지 않았다. 자고 싶어도 나는 잘 수 없었다.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야 맞이라도 할 것 아닌가? 오지 않으니 오기를 기다릴 도리밖에 없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의 심정을 알 법했다. 하루밤도 견디기 힘든데, 매일 잠이 오지 않는다니 어찌 살까? 하루 밤이라도 잘 수 있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잠을 청(請)하는 일이였다. 혼을 부른다(招魂)더니, 잠 조차 마음대로 자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저 잠을 청하는 일(請眠)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잠이여 어서 오소서!” 첨언: 이글에 오지 않음 찾아가면 된다는 댓글을 단 여인이 있었다. 그것은 벌써 12년 전 어느 봄날, 화려하고 찬란했던 그 해 5월이었다. 글쎄,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그렇다고 찾는다고 오지 않는 잠이 올 리 만무하다. 그러니 오지 않음 찾아 가는 것 밖에 별 수 있겠느냐는 그녀의 말은 귀여운 말장난임이 분명하다. 이제 잠이 오지 않으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나이가 되었다. 그것도 뒤돌아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추억이라는 기억들이 축적된 재산처럼 우리는 소유하며 살아간다. 희망하며 살아야 행복한 법인데 철지난 일기장을 뒤적이며 잠 못 이루는 밤은, 분명 편안한 일이 아닌 게 분명하다. 그녀를 생각하며 옛 것을 다시 올린다. 그 여인은 잠 오지 않는 밤을 어찌 보내시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