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 실재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 물리학적 관점 / 김성구 4. 물리적 실재

필부 2007. 10. 3. 16:17
 

궁극적 실재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 물리학적 관점 / 김성구 <이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물리학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는 물리량을 통해 정의(定義)한다. 이렇게 물리량으로 기술할 수 있는 존재를 물리적 실재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실재가 이렇게 물리량을 통해서 정의된다면 측정 전에도 물리량에 관해서 얘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물리학의 이론이 측정 전에도 물리량에 관해 예측할 수 있다면 이는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측정을 통해서만 물리량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객관적 실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불확정성 원리가 말하는 것은 관측행위가 관측결과에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위치를 측정하면 이미 물리계는 측정전과 달라지고 속도를 측정하면 물리계는 또 다른 방식으로 달라지므로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입자의 위치를 측정한다면 빛이 입자에 부딪친 후 측정 장치에 도달한 빛을 보고서 입자의 위치를 알게 된다. 그런데 빛이 입자에 부딪친 순간 빛은 입자를 때려 튕겨나가게 하므로 입자의 속도가 크게 바뀐다. 입자가 어디에 있다고 관측결과를 얻는 순간 이미 입자는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입자의 위치와 속도 즉 상보적인 양 양쪽에 어느 정도의 불확정도(Uncertainty)를 갖고 입자의 상태를 측정하거나 아니면 철저히 상보적인 중의 어느 한 쪽을 무시하고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입자의 상태를 측정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관측행위는 관측결과에 반드시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상보적인 물리량들의 조화에 의해 기술되는 우주에서 상보적인 양 하나를 무시하고 관측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이 보는 현상계는 객관적인 실재일 수가 없다. 인간이 보는 것은 자기가 창조해서 보는 것이다. 측정전의 그 무엇을 객관적 실재라고 상상해 볼 수는 있다. 측정 전의 그 무엇은 파동으로서 파동함수로 기술된다. 그런데 파동함수는 추상적인 기호에 불과하다. 입자가 보여주는 파동성은 입자가 해파리처럼 널리 퍼져서 진동하기 때문에 생기는 진동현상이 아니다. 이 파동은 입자가 존재할 확률을 말해주는 확률파(確率波)다. 물결파는 물이 진동하는 현상이고 음파는 공기나 기타 매질이 진동하여 생기는 것이지만 확률파는 실재하는 무엇이 진동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다. 확률파에는 아무런 실재도 없다. 그저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존재나 상태가 어떤 확률을 가지고 중첩되어 있을 뿐이다. 만약 파동함수가 고양이의 상태를 기술한다면 삶과 죽음을 한 몸에 중첩된 고양이를 나타낸다. 이런 고양이가 실재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파동을 기술하는 파동함수는 확률과 관계있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현대 물리학에서는 모든 물리적 정보가 파동함수에 들어 있다고 본다. 인간이 측정하여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파동함수가 포함하고 있는 많은 가능한 상태들 중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본다. 현대 물리학적 해석에 의하면, 인간이 보는 현상계란 이 파동함수가 그려내는 여러 가지 가능한 세계 중에서 관찰자가 하나를 골라서 보는 것이다. 현상계란 파동함수로 기술되는 ‘그 어떤 것’에서 상보적인 물리량들 중 어느 한 쪽을 무시하고 인간이 창조해낸 것으로서 궁극적 실재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보적인 양들을 모두 포함하는, 파동함수가 그리는 세계를 궁극적 실재라고 말할 수도 없다. 삶과 죽음 같은 온갖 상보적인 요소들이 중첩되어 있는 것을 실재라고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상계도 실재가 아니고 측정하기 전 파동으로 기술되는 그 무엇도 실재가 아니다. 실재라고 할 만한 것이 어디에도 없으면서도 파동함수가 물리계를 기술하며 존재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파동함수로 기술되는 그 어떤 것, 즉 존재의 근원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굳이 여기에 이름을 붙인다면 공(空)보다 더 적당한 이름은 없을 것이다. 추상적인 세계라 공이라고 불렀지만 온갖 생멸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 이것을 진공묘유라고 부른다고 해서 무리는 없을 것이다. 관측행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분석행위마저 물리계에 영향을 미친다. ‘너’와 ‘나’로 나눌 수 없는 ‘그것’에서 ‘우주’와 ‘나’를 생각하는 순간 나타난 우주는 이미 ‘그것’과는 다른 우주라는 뜻이다. 여기에 대한 실험적 증거가 있으니 그것을 EPR실험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