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불교는 불교인가 / 조준호 초기경전에 따른 교리적 검토 4. 기복신앙의 불교적 비판 경전에서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업보(業報)를 본다’라고 한다. 이렇듯 불교의 업설(業說)은 궁극적으로 성불·열반과 직결되는 연기법과 함께 구제론적 성격의 가르침이다. 업보에 대한 가르침을 간단히 말하면 ‘(인간) 행위에 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어떤 행위에 대해 어떤 결과가 나타난다고 하는 행위와 그 결과의 인과 법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연기라는 진리에 의해 사람이 짓는 어떤 일이나 행위에 상응하는 어떤 결과가 반드시 나온다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현생의 많은 사람이 짓는 행위의 과거 원인과 미래의 결과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문이나 주술 그리고 기도를 매개로 현실적인 이익을 추구하려는 태도에 대해 비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업보설의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 행위와 결과에 있어 외부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존재나 세계에 좌우된다고 믿고, 그렇게 주재하는 그들을 기쁘게 하고 달래거나 또는 교감을 통해서 은총을 비는 행위가 바로 기복인 것이다. 부처님이 주술이나 주문 그리고 기도 또는 의례를 부정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신의 뜻이나 귀신들의 장난과 조화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거나 아니면 우주의 거대한 영적 흐름과 법칙에 인간의 운명이 끼워 맞추어져 있다고 하는 생각을 비판하고 부정한 것이다. 기복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유명한 경전이 있다. 한역 《가미니경(伽彌尼經)》6)과 그에 대한 팔리 대응경전7)이 그것이다. 경전은 사제의 의례를 통한 기도로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한 마을의 촌장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7) Sam?utta Nika?a (PTS) vol.Ⅳ. pp.310ff. 6) 중아함 권17의 《가미니경(伽彌尼經)》. 세존이시여, 서쪽에서 온 바라문 사제들이 물병을 들어올려 물을 뿌려 정화시켜 주는 의례나 화환으로 치장하여 올리는 의례나, 스스로 물에 들어가 씻는 정화 의례나 또는 화신(火神)에게 제사 지내는 의례를 행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례를 통해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내 하늘 나라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존은 아라한이며, 정각자이십니다. 그러니 당연히 세존께서도 사람이 죽으면 행복한 천상에 태어나도록 해 주실 수 있겠지요? 촌장의 이와 같은 질문에 부처님은 곧바로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촌장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살생하고 훔치고 사음을 행하고 거짓말과 삿된 생각에 빠진 자였다고 하자. 그리고 어느 때에 그의 목숨이 마치고 난 후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모여 모두 두 손을 치켜 모아들고 주문을 외우면서 그가 부디 하늘 나라에 태어날 수 있도록 찬양·기도하면서 그 사람의 주위를 돌며 떠나지 않았다고 하자. 이때 과연 죽은 자가 여러 사람들의 찬양과 기도로 하늘 나라에 태어날 수 있겠는가? 두말할 것이 없이 그럴 수 없다고 촌장은 답한다. 생전에 살생과 도둑질 등의 악행을 했던 사람을 위해 주문을 외우면서 비는 기도 의례로써 좋은 곳에 날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솔직한 심정의 토로이었을 것이다. 두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우고 찬양·기도했다고 할 때 바라문교의 신들이 기도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는 것 즉, 기도라는 말과 함께 찬양 또는 찬송의 뜻이 쓰여졌다는 것이다. 찬송의 팔리 어는 토마나(thomana)이며 칭찬(稱讚)으로 한역되었다. 기도는 팔리 어로 ‘아야짜나’(a?a?ana)이며 한역으로는 구색(求索)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칭찬의 원어에 해당하는 토마나의 산스크리트는 스토마나(stomana)인데 바라문의 의례에 있어 전문적인 용어로서 음률에 맞추어 부르는 만트라(mantra)를 나타낸다. 만트라의 한역은 진언(眞言)이나 주(呪) 그리고 신주(神呪) 또는 명주(明呪) 등으로 나타난다. 비는 행위(기도)와 그 대상인 초월적인 존재인 신들 그리고 그것을 집전하는 데 있어 매개가 되는 찬송가로서 만트라는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구조는 유신론(有神論)적인 특징을 가진 모든 종교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관관계를 염두에 두고 부처님이 기복 즉, 비는 행위에 대한 비판으로 단지 기도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더 나아가서 그 대상이 되는 신들과 그 매개인 만트라 주문까지 모두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계속해서 부처님은 생전에 착한 행위를 지은 사람을 마찬가지 방법으로 지옥에 태어나도록 주문을 외우며 기도한다고 해서 그렇게 될 수 없다고 하여 인간 행위의 결과가 주문과 기도 그리고 의례와 같은 타력(他力)에 의해 바꾸어질 수 없고 엄연한 선인선과(善因善果)·악인악과(惡因惡果)를 자업자득(自業自得) 또는 자작자수(自作自受)한다는 업보설(業報說)을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계신다. (악행자의 경우) 그것은 마치 큰 바위를 깊은 물에 던져 놓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바위가 떠오르도록 합장하며 주문과 기도로써 찬송하는 것과 같고, (선행자의 경우) 버터나 기름이 담긴 병을 깊은 물에 던져 깨뜨렸을 때 병 조각은 가라앉고 버터와 기름은 자연히 물 위로 떠오를 것을 사람들이 합장하며 주문과 기도로써 가라앉도록 하는 것과 같다. 최종적으로 이 같은 비유를 들고 난 후에 팔정도를 언급하는 것으로서 기도의 무효용(無效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왜냐하면 팔정도가 기도나 주문과 같은 타력(他力)을 전혀 전제하지 않는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실천법이기 때문이다. 이 경은 단적으로 불교가 당시의 미신적 그리고 기복적 종교 행태들에 대해 얼마나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처님의 이러한 비판은 시대적 당위성이었다. 그러한 당위성으로 인해 불교는 새로운 종교로 흥기할 수 있었고, 인류 역사에 있어 보편성으로 인정되어 아직까지 그 빛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중심교리―연기·사성제·삼법인 등등―에 있어 그 어느 가르침도 주술이나 기도로써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가능성도 담고 있지 않다. 학자들이 이 시기의 불교야말로 인류 종교사에서 있어 가장 비판적이고 지성적이고 이지적이고 합리적이며 그리고 계몽적인 종교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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