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철학 / 김형효 1. 개념의 철학과 소유주의의 사상

필부 2007. 1. 21. 00:09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철학 / 김형효 자기철학을 하는 몇 안 되는 국내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김형효 교수가 8월 31일 20여 년간 몸담았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직(철학종교연구)을 정년퇴임했다. 김 교수는 ‘데리다의 해체철학’ 등 무려 18종에 달하는 저서에서 보여준 왕성한 연구 활동과 동서고금의 철학을 넘나드는 철학함의 자유로움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아온 인물. 퇴임을 기념해 한국학중앙연구원측이 마련한 8월 26일 강연회에서 김 교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철학’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이 자리에서 김 교수는 ‘해체적 사유와 구성적 사유’ ‘소유론적(존재자적) 사유와 존재론적 사유’라는 철학소(哲學素)로 철학사를 읽어내는 자신의 독법을 소개하며, 앞으로 철학은 해체적 사유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했다. 아울러 불교야말로 해체적 사유의 전형이며, 철학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형효 교수의 퇴임강연 전문을 소개한다. 1. 개념의 철학과 소유주의의 사상 철학은 인간과 그 인간이 사는 세상을 해석하는 학문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서양철학사에서 플라톤(Platon)에서부터 시작된 철학이 세상을 존재자적인 학문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인간과 그 세상을 잘못 읽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존재자적인 학문이 철학이라면, 그의 철학은 이제 철학이 아니고 ‘미래적 사유’(das kunftige Denken= fu ture thinking)로 불리기를 바랬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철학의 종말’(das Ende der Philosophie=the end of philosophy)이다. 재래의 존재자적인 형이상학(die ontische Metaphysik=ontic metaphysics)으로서의 철학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과학이 그것을 이었기에 그런 철학을 대학에서 강의한다는 것은 과학이 탈각해서 버린 허물을 아직도 뒤집어 쓰고 발버둥치는 서글픈 형상에 비유된다 하겠다. 하이데거가 파괴하려고 했던 존재자적 철학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형이상학적 자아의 의식학, 그리고 자아의 의식이 표상하는 대상을 존재자적으로 명사화해서 보는 인식론을 뜻한다. 둘째로 그것은 인간중심주의의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 여기서 중세적 신중심주의와 근대적 인간중심주의를 구태여 구분할 필요는 없다. 신은 인간의 개념을 상승시킨 인격의 신성화에 다름 아니므로 하이데거는 저 두 가지를 차이나게 읽지 않았다. 자아의 형이상학과 대상의 인식론, 그리고 인간중심주의의 도덕학은 다 존재자적 철학의 삼원체제라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적인 철학에서 존재론적 사유(das ontologische Denken=ontological thinking)의 복귀를 주장했다. 복귀는 플라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사유로 되돌아 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는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새로운 미래적 사유와 재래 철학과의 본질적 차이를 나타낸다. 존재자(das Seiende=being)는 명사로 개념화되는 실체와 같은 것이지만, 존재(das Sein=Being)는 명사화가 불가능한 동사적 사건(Ereignis=event)의 뜻을 함의하고 있다. 즉 존재는 생멸의 부단한 사건을 지시하므로 하이데거는 그것을 자동사적 의미를 지니는 뜻으로 독일어로 ‘Seyn’이라고 표시하기도 하였다. 존재자는 의식이 개념화할 수 있기에 자의식이 소유하거나 장악할 수 있는 인식의 영역에 해당한다. 개념은 자의식이 관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소유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개념화가 안되는 부단한 흐름으로서의 존재론적 현존은 없어지는 부재의 사라짐을 안고 있다. 모든 존재는 내면적으로 부단히 변화하며 외면적으로 다른 것과의 관계를 떠나서 태어나지 않는다. 존재는 일의성으로 정의되지 않고 이중성을 운명적으로 안고 있다. 흑판이라는 존재는 문자를 쓰고 지우기 위하여 존재하고, 분필의 존재와 연관되어 존재한다. 문자를 쓰고 지우는 사이에서 그 흑판은 서서히 낡아지고, 분필과 지우개가 없으면 그 흑판도 생기지 않았으리라. 내면적 이중성이나 외면적 이중성이나 다 같은 구조다. 하이데거는 이런 이중성(Zwiefaltigkeit= duplicity)을 차이(Unterschied=difference)가 나는 두가지가 서로 상대방에게 연결고리를 맺고 있다는 뜻에서 차연(差延, Unter-Schied=differance)이라고 불렀다. 差-延은 差-異와 延-期(또는 延-長)라는 두 개의 다른 의미가 하나로 묶여 공존하고 있어서 의미의 초점이 선명하지 않다. 일종의 반(反)개념으로서 명석판명한 개념이 아니다. 이 차연의 용어는 프랑스의 데리다(J. Derrida)에 의하여 ‘la differance=differance’라는 조어로 더 보급되었으나, 하이데거가 데리다보다 더 앞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차연의 용어는 이미 원효(元曉)의 불교적 사유에서 불이이불이(不一而不二)나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의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것은 억지 춘향 격으로 견강부회하려는 것이 아니다. 차연의 사유방식이 이미 고대 철학사의 여명기에 동서의 울타리없이 공통적으로 세상의 이법을 읽는 방식으로 발견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데리다가 이미 이것을 직시했다. 하이데거가 소크라테스(Sokrates) 이전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존재론과 헤라클레토스(Herakleitos)의 생성론을 이율배반적으로 읽지 않고, ‘존재 즉 생성’의 이중성으로 보려는 시도도 역시 차연의 다른 이름에 해당한다 하겠다. 이런 단편적인 지적은 벌써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념 철학과 차연 철학의 차이가 존재해 왔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데리다가 이미 그런 철학사의 두갈래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개념철학과 차연철학의 두갈래는 하이데거적으로는 ‘존재자의 철학(Philosophie des Seienden=philosophy of beings)/존재의 사유(Denken des Seins=thinking of Being)’로, 프랑스의 20세기의 가톨릭 사상가인 마르셀(G. Marcel)의 철학용어로는 ‘소유론(la pensee de l’avoir=thought of having)/존재론(la pensee de l’etre=thought of being)’으로, 데리다의 분류에 따라 ‘말중심주의(le logocentrisme=logocentrism) / 문자학(표지학)(la grammatologie=gram- matology)’으로, 불교철학의 용어로는 ‘自我의 알음알이/無我의 지혜’로, 老子의 도가적 용어로서는 ‘能爲/無爲’로 각각 나누어진다 하겠다. 여기서 생소한 용어들이 등장해도 조금도 개의할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단지 이 글의 성격적 위상을 미리 추상적으로 도표화하기 위한 안내표지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나는 후자의 입장에 서 있다. 철학사적으로 전자와 후자의 계열은 용어상의 표현적 차이를 넘어서 내용상으로 서로서로 뭉쳐진다 하겠다. 인간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먼저 지각하는 것은 이 세상에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삼라만상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들을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보고 있는가? 이것이 철학적 사유의 시작이다. 이런 삼라만상의 이해방식과 보는 방식이 앞에서 거론된 ‘개념철학/차연철학’의 구분을 낳았다. 개념철학에 따르면 삼라만상은 자아의 의식 앞에 나타난 대상이고, 나는 그 대상을 알지 못하므로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하여 개념적으로 그것을 장악하고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 자아는 주관이고, 대상은 나의 주관 앞에 선 문제(le probleme=problem)로서의 객관이 된다. ‘문제’는 마르셀 철학의 중요개념인데, 그냥 단순한 어휘로 내가 쓴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은 단독 명사로 분류되어야 하고, 고유한 뜻을 품고 있어야 한다. 즉 철학적으로 실체와 자기 고유성이 의미론상으로 설정된다. 은연중에 개념철학은 자아의식을 중심으로 삼고 삼라만상의 현상을 내 앞에 판단하기 위하여 내 세운다. 이것이 ‘문제’의 개념이다. 대상을 판단하는 것은 곧 대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소유의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마르셀이 ‘문제’를 해결하는 판단철학과 소유론과의 사이에 하나의 깊은 유대가 암암리에 맺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탁견이다. 개념철학은 현상을 소유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 현상을 非我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현상을 단독적인 존재자로서, 명석판명한 명사로서 의식이 규정한다. 명사로서 작명이 안된 대상은 아직 자아의 의식에 정리가 안된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게 된다. 명사가 실체적인 존재방식의 완성으로서의 自家性인 자기 고유성의 정립으로 고착된다. 이것이 지식의 정의다. 명사로서의 현상은 개념이고, 그것은 곧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자에 다름 아니다. 존재자는 삼라만상을 개별적 고유성으로 보는 방식과 같다. 그리고 그 개별적 고유성은 형이상과 형이하로 분류된다. 현상에 대한 형이하적 장악은 경제실리적 소유법과 통하고, 형이상적 장악은 도덕명분적 소유법을 도입한다. 즉 형이하적 문제는 사회생활에서 경제실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편리’라는 진리의 길을 부르고, 형이상적 문제는 인간사회의 정신적 갈등과 소외의 문제와 직결되는데 도덕명분적으로 ‘정의’라는 진리의 길을 요청한다. 편리(便利)와 정의(正義), 이 두 가지가 재래의 개념 철학의 영역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았던 진리의 대명사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 두 가지의 진리는 다 현상을 의식의 문제와 대상으로 여겼던 소유론적 사고방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경제실리주의는 세상의 현상을 물질적으로 장악하여 편리를 제공하려는 인간이성의 지능적 측면과 연계되어 있고, 도덕명분주의는 세상의 현상을 정신적으로 장악하여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적 측면과 유관하다. 그래서 다 소유주의적 존재자의 철학이라고 우리가 부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다 개념상의 문제를 야기하는 불편과 부정의를 극복하고 해결하려는 지능과 의지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개념 철학은 두 가지로 요악된다. 그 하나는 자아의 판단하는 의식을 중심에 두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대상의 문제를 경제실리적으로 그리고 도덕명분적으로 해결하려는 소유적 진리관이다. 경제실리적 편리의 진리를 가치로 여기는 자아의 판단은 쉽게 이기배타적인 충돌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 진리는 이해관계에 사람들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이익을 쟁취하는 자연적 본능의 소리에 쉽게 기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산장수의 이익은 얼음장수의 손해와 같이 가기 때문에 두 직업의 사람들이 서로 이익에서 충돌한다. 경제실리주의는 이기배타적 속성을 지닌다. 경제실리주의도 인류의 보편적 편리를 위한 보편주의의 성향을 지니기도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그 보편주의적 시각도 인간중심주의적인 이익을 위하여 비인간적인 자연적 존재자들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키려는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기배타의 구조를 떠난 것은 아니겠다. 그렇다면 도덕명분주의가 설파하는 정의의 진리는 이기배타적 속성을 지우는 것 아닌가? 도덕명분주의는 선의지의 사회적 실현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강력한 보편주의의 명분을 띠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선의지가 무엇인가? 모든 이가 동의하는 그런 선의지가 실질적으로 가능한가? 도덕적 선의지를 설파한 유가의 공자를 통하여 역설적으로 보편적 선의지의 실재가 선명하게 설정될 수 없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공자가 《논어》의 ‘양화편(陽貨篇)’에서 말하였다. ‘인을 좋아하되(好仁)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어리석음(愚)이 되고, 안다는 것을 좋아하되(好知)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큰 소리만 탕탕치는 허풍(蕩)이 되고, 신의를 좋아하되(好信)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나와 남을 해치게(賊) 되고, 곧기를 좋아하되(好直)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가혹하리만큼 여유가 없고(絞), 용기를 좋아하되(好勇)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난폭해지고(亂), 굳세기를 좋아하되(好剛)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광기(狂)가 된다.’ 이것을 유명한 공자의 ‘육언폐단(六言六蔽)’이라고 부른다. 공자는 여기서 모든 가치가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폐단을 언급하면서 학문의 공부를 통하여 그 폐단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즉 도덕적 선의지가 학문적 공부의 성취를 통하여 자신의 어둠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공자에 비하여 노자는 전혀 다른 사상을 펼친다. 말하자면 노자는 도덕적 선의지가 이미 그 자체 어둠의 요소를 필연적으로 회임하고 있기 때문에 학문의 공부와 이성의 판단을 통하여 그 어둠이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은 이미 불선을, 그리고 덕은 악덕의 어둠을 자신의 이면에 감추고 있는 것이 이 우주의 도(道)의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덕경》의 2장에 나오는 말이다. ‘천하가 다 미(美)를 미라고 여기면 그것은 악(惡)이고, 선(善)을 선이라고 여기면 그것은 불선(不善)이다. 고로 유무(有無)가 상생하고, 난이(難易)가 상성하고, 장단(長短)이 상형하고, 고하(高下)가 상경하고, 음성(音聲)이 상화하고, 전후(前後)가 상수한다.’ 27장은 더 직설적이다. ‘고로 선인은 불선인의 스승이고, 불선인은 선인의 자산이다. (故善人不善人之師 不善人善人之資)’ 노자는 선의지가 순진하게 자기 뜻대로 세상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선의 어둠이 무의지적으로 생기하여 선의지적 도덕명분주의를 퇴색시킨다고 본다. 그러므로 선의지가 비록 도덕명분주의의 이념에 의하여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려 하나, 그런 능위적 작업이 생각대로 되지 않으려니와, 또 세상이 그렇게 선의지에 의하여 소유되지 않음을 노자는 갈파하였다. 그동안 인류는 이런 선의지의 능위(能爲)로 세상을 새로 만들려는 그런 의지의 도덕학과 형이상학을 수 없이 펼쳤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구악이 일소되면 거기에 반드시 신악이 등장하여 선의지에 의한 세상의 소유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제 인류는 이런 낭만적 이상의 꿈에서 깨어나야 할 때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명분주의의 실천철학도 자아의 관점에 따라 다른 차이를 노정하게 된다. 내가 제시하는 선이 보편적으로 만인에 의하여 동의되지 않고 반드시 반대의견에 부딪치면서 사회적 이견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이것이 사회적 투쟁의 변증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내가 확신하는 선은 타자에 의하여 그 선의 이면에 깃들어 있는 불선의 요소로 인지되어 내가 주장하는 선에 대립하게 된다. 그래서 도덕명분주의는 결국 불교의 유식학적인 용어인 의사식(意思食)의 싸움으로 치닫게 된다. 의사식은 자기의 의사를 진리로 확신하여 타인의 의사와 싸워 그 타인의 의사를 먹어치우려는 승리의 집념을 말한다. 경제실리주의가 식욕의 단식(段食)과 성욕의 촉식(觸食)을 위주로 삼는다면, 도덕명분주의는 의사식(意思食)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겠다. 김형효 |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서울대 철학과 졸업. 벨지움 루벵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군사관학교, 서강대, 정신문화연구원, 루벵대 철학최고연구원 등의 교수를 역임 했다. 《데리다의 해체철학》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 등의 저서와 논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