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2 / 김 종 욱 1. 중국 철학의 인간본성론 (2)

필부 2006. 10. 8. 03:35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2 / 김 종 욱 1. 중국 철학의 인간본성론 (2) 이러한 사용은 감추어 두었던 근본적인 것이 드러난다는 측면에서는 ‘현상(現象)’이고, 그렇게 드러난 것을 부려 움직인다는 측면에서는 ‘작용’이다. 이렇게 볼 때 체를 ‘전체를 통일하는 하나’로 이해할 경우, 체와 용의 관계는 본체와 현상의 관계가 되며, 체를 단순히 ‘모양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체와 용의 관계는 형체와 작용의 관계가 된다. 노장 사상을 계승하고 체용의 논리를 처음으로 철학적인 의미에서 거론한 왕필(王弼:226 ∼ 249) 자신은 체와 용을 형체와 작용의 관계로 보았으나, 그후 남북조 시대의 불교나 송대의 성리학에서는 체와 용을 주로 본체와 현상의 관계로 규정하였다. 혹자는 체용의 논리가 《기신론》이나 혜능에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에 이미 위진 현학 때부터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에만, 중국화된 불교의 형성에 있어서 도가적 본체론의 요소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가적 자연 본체론과 이와 연관된 불교의 진여 본체론 등에서 제기된 우주적 본체론의 색채를 입혀서, 원시 유가의 도덕적 인성론을 형이상학적으로 확대 해석한 사람이 바로 주자(朱子:1130∼1200)이다. 여진족의 금(金)에 쫓겨 나라의 반을 상실한 남송(南宋) 시대의 사람이었기에, 상처받은 한족의 중화정신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는 외래의 사상인 불교와 탈속적인 도가 사상에 대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도가와 불교에 대해서 유학을 새롭게 수립하는 것은 한 마디로 무(無爲, 無心)에 대한 유(理氣)의 확립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사상의 최고 범주인 도(道)를 무(도가)나 공(불교)이 아닌 이(理)로 봄으로써, 도가와 불교와는 차별되면서도 원시 유가의 전통을 계승하는(道統) 새로운 사상(新儒學)을 정립하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주자는 도와 이가 거의 같은 뜻임에도 불구하고, 도를 이의 의미로 대체하여 사용하고자 했다. 주자식의 표현에 의하면, ‘도’가 ‘오래도록 통하는 것(萬古通行者)’ 또는 ‘비교적 넓은 것(較寬)’을 의미한다면, ‘이’는 ‘오래도록 바뀌지 않는 것(萬古不易者)’ 또는 ‘비교적 실질적인 것(較實)’을 뜻한다. 여기서 실질적이라고 하는 것이 ‘이’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인데, 그것은 ‘이’가 ‘도’와 같이 우주론적인 원리이면서도 인간사의 이치(人事之理)와 무관하지 않은 원리라는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란 ‘반드시 그렇게 되는 필연의 존재법칙(所以然之故)’임과 동시에 이것을 근거로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당연(當然)의 가치 법칙(所當然之則)’이기도 하다. 우주는 이러한 이와 기(氣)로 되어 있다. 이가 ‘천지를 이끄는 것(天地之帥)’으로서 천지의 원리 또는 생명의 근거(生物之本)라면, 기는 ‘천지를 채우고 있는 것(天地之塞)’으로서 천지의 구성 요소 또는 생명의 자료(生物之具)이다. 그런데 우주적인 필연의 법칙이 인간 사회에서의 당연의 이치와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근거가 된다는 것은, 우주적인 원리(天理)가 인간 속에 함장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이(人之所得於天之理)”를 성(性)이라 하니, “성이 바로 이이다(性卽理).” 이것은 인간의 본성(性)이 우주 만물의 이법(理)과 같다고 주장함으로써, 인성론에 본체론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것임과 동시에 인간 사회와 무관한 도가적인 무위(無爲) 본체를 비판하는 것으로서, 소위 성리학(性理學)이란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처럼 인간이 받아 지니고 있는 우주의 이치를 천지지성(天地之性) 또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세계의 근원인 이에서 온 것이기에 순수하고도 지극히 선한 것이며,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부연된 본성(本然之性)이다. 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듯이, “전적으로 이만 가리키는(專指理)” 본연지성도 “이와 기가 뒤섞여(理與氣雜)” 구체적인 육체를 구성하는 기질(氣質, 氣는 陰陽을 質은 五行을 가리킨다.)을 떠날 수는 없으니, 여기서 나온 성품을 일러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한다. 기의 맑고 탁함의 차이에 따라, 기질지성에도 선하고 악한 차이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비록 본성은 만인 보편의 것으로 똑같이 순수하고 선한 것이지만, 기질은 개인마다 차이나는 것으로 충분히 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구분을 통해 인성의 선악을 해명하려는 시각에서 볼 경우, 맹자의 성선(性善)은 본연지성만 보고 기질지성을 보지 못함으로써 성악의 기원을 설명하지 못한 것이 되고, 순자의 성악(性惡)은 기질지성만 보고 본연지성을 보지 못함으로써 성선의 측면을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한 것이 된다. 이처럼 이기론(理氣論)의 입장에서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분함으로써, 인성의 선악 논쟁을 해소하려한 주자는 이번에는 마음의 체용(體用) 관계를 통해서 인성의 선악 문제를 설명한다. “마음에는 체와 용이 있는데(心有體用)”, 아직 발현되기 전의(未發) 본성(性)을 마음의 체라 하고, 이미 발현하여(已發) 움직이는 정감(情)을 마음의 용이라 한다. 그런데 본성으로서의 마음(心之體)은 우주의 이치를 체현한 도심(道心)으로서, 항상 지극히 선한 것이지만, 정감으로서의 마음(心之用)은 욕망과 유혹에 이끌릴 수 있는 인심(人心)으로서, 악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유가의 모든 사상가가 그러하듯이, 주자 역시 인륜적 도덕성의 고양을 통한 치세(治世)의 수립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도 선악의 기원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할 수밖에 없었고, 선과 악이라는 상반되는 요소를 정합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심이나 성을 도심과 인심, 성과 정,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라는 식으로 양분하였다. 그렇게 한 다음, 맹자적 존심(存心:선한 마음의 간직)과 순자적 화성(化性:악한 정감의 교화)을 종합한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欲:천리의 보존과 인욕의 제거)의 실현을 위해, 악의 경향성을 지닌 인심의 정감과 기질지성을 부정시하는 엄숙주의의 길을 열어 놓았다. 더욱이 주자처럼 인간이 인의예지의 도덕적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萬物之靈)이 된다는 식으로 인간만의 본성을 강조할 경우, 우리는 그런 품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동물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 다른 민족, 다른 사상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가 특정한 입장에 의해 사전에 각인되었을 때 야기되는 보편적인 문제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