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부재와 긴장된 글쓰기 / 조병활 1. 사례와 실상 (1)

필부 2006. 7. 1. 19:59
 

논쟁 부재와 긴장된 글쓰기 / 조병활 1. 사례와 실상 - 목 차 - 사례와 실상 원인과 이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토론과 논쟁은 학문 발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다. 개진된 어떤 학문적 주장에 대해 다른 학자가 자기 주장을 발표하고 서로 논쟁·토론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에 속하지만, 매우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학문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자기 주장의 모순과 미비점을 발견·보완해 보다 완벽한 이론·주장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토론·논쟁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면 토론과 논쟁이 활발하지 못하다는 것은, 분야가 무엇이든 간에, 그만큼 학문적 발전이 미미하다는 것과 통한다.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견해를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고, 또 자기 분야에 나타난 새로운 주장에 대해 자기의 입장을 발표하지 못하는 학자는 이미 ‘죽은 학자’인지도 모른다. 새로움이 학문 세계에 항상 가득할 필요도 없고, 자기 전공분야의 모든 것에 대해 일일이 자기 입장을 명백하게 밝힌다는 것도 힘든 일임에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학자라면 기본적으로 자기 분야의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새롭게 접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문제의식은 부단한 학문적 연구에 의해서도 생기지만, ‘정태적인 연구’보다는 토론과 논쟁 가운데서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 토론과 논쟁이, 특히 학자 상호간의 치열한 논쟁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타인이 이미 연구·정리해 놓은 것을 받아들여 그대로 자기 주장인 양 발표하고자 하지 않는 다음에야― ―만약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학자가 아닌 ‘정보전달자’로 불려져야 한다― ―학자가 토론과 논쟁을 싫어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것’을 통해 자기가 보지 못하는 점을 알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자기의 부족을 채울 수 있는데도 ‘그것’을 회피하거나 싫어한다면 적어도 양식(=실력) 있는, 올바른 학자의 길을 걸어가려는 학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열렬히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이 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학자의 태도임에도 불교학계에는 논쟁을 ‘회피’하거나 ‘싫어하는’, 아니 ‘거부’하는 ‘학자·불교운동가’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임을 부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논쟁회피가 불교학계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한국 대부분의 학계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몸담고 있는 곳이 불교계이고, 특히 불교학계에 관심을 갖다 보니 ‘논쟁을 회피하는 학계’하면 불교학계가 얼른 떠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교학계의 ‘토론·논쟁 부재의 실상’이 어떤지”를 취재하면서 겪은 사례를 통해 알아보고, ‘논쟁 회피 내지 혐오증’ 문제를 본격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금년 6, 7, 8월 불교신문에서 ‘간화선 문제’로 한창 지상논쟁(紙上論爭)이 벌어지기 전이다. 한형조 교수 인터뷰 기사에 대해, 내용적으로 봐선 한국의 간화선 연구자나 수행자에게 상당히 충격적이고 도발적이었음에도 누구 하나 응답이 없었다. 논쟁을 촉발시키려고 인터뷰한 것은 아니었다. 워낙 응답과 말이 없는 ‘집안’이라 기대를 안한 면도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그래도’ 하는 생각이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풍문에는 선방에서 이 문제로 상당히 격앙돼 있고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한다고 들렸다. 그러나 한편의 글도 신문사로 오지 않았다. 그러다 기사가 나간 지 한참 뒤, 정확히 1개월 보름 뒤 미국에 계신 한 스님이 “반론을 보내도 되냐?”고 물어왔다. 그 스님은 예정대로 글을 보내왔고, 논쟁은 비로소 시작됐다. 이를 좀더 확대시키고자, 모 대학 모 교수를 찾아갔다. 글을 받고자 해서다.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왔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 사람들이 하는데 내가 어떻게 글을 써, 위치가 있지.”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그 교수는 너무 솔직하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좀 돌려서 “시간이 없다.”거나 “그 주제에 나는 관심이 없다.” “아직은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었는데도 그렇게 ‘솔직하게’ 말했는지 모른다. 어찌됐든 그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논쟁을 싫어하는 불교학계의 풍토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확인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유도 ‘나이’ 때문이라는 점에서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학자가 자기 주장을 펴는 데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말과 글을 제대로 조리있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자기가 관심있는 분야가 논제로 떠오른다면 과감하게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하물며 연구하는 교수 직책에 있고, 자기 분야가 그곳인데도 ‘단지’ 나이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논쟁을 거절하다니. 신문에 글을 싣기가 싫어서도 아니고, 남의 논쟁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쓴 논문을 주면서 신문에 소개해 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