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불교의 만남 / 김종욱 4. 산은 역시 산이다 1) 하이데거의 존재
하이데거와 불교의 만남 / 김종욱 4. 산은 역시 산이다 1) 하이데거의 존재 ‘산은 역시 산이다’라고 할 때, 역시(亦是)는 ‘아무리 생각해도’ ‘늘 그렇듯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자성과 존재자성을 통해 아무리 분별하고 사유해도, 그런 분별적 사유 이전에 제 스스로 늘 그렇게 산은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분별되기 전과 같이’라는 뜻을 살리면 ‘산은 여전(如前)히 산이다’가 되고, ‘분별되기 전과 다름없이’라고 읽으면 ‘산은 의연(依然)코 산이다’가 된다. 어쨌든 ‘산은 역시 산이다’라는 차원은 자성과 존재자성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통해 대긍정되는 존재와 진여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무로서의 존재는, 존재가 존재자적인 것일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존재는 인간의 표상적 대상화로부터 물러나 있다는 것, 그러나 그렇게 형이상학적인 통제로부터 물러나 있을 때 도리어 존재자 전체의 진리가 제대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 존재는 존재자와는 차이나는 것으로서 ‘주어진다(es gibt)’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으로서의 존재를 주는 그것(Es)이란 무엇일까? 이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근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그것이 존재를 준다고 하더라도 존재를 초월한 상위의 어떤 것이 존재를 산출해 낸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를 떠나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이 존재를 준다’는 말은 ‘존재가 그것으로서 주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존재를 주는 ‘그것’이란, 존재가 주어지는 근원적인 방식 또는 존재가 본래대로 드러나는 ‘사태의 실상(Sach-Verhalt)’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발현(發現, Ereignis)이다. 발현이란 본래의 고유한 모습(Eigenes)을 허용하여(lassen) 내보이는(sich zeigen) 사건, 고유함(Eignen)에로 가져다 주는(erbringen) 일, 즉 각자 고유화되면서도 서로에게 귀속되어 드러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는 발현으로서 본현한다(Das Seyn west als das Ereignis)”고 말한다. 그런데 존재는 언제나 시간과 함께 주어져 드러난다. 존재는 일종의 현존(Anwesen)인데, 현존에는 현재(Gegenwart)와 존속(Andauern)이 작용하고 있으니, 존재 그 자신은 시간으로부터 드러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현은 존재와 시간의 공속(共屬)이다. 또한 존재는 사유와 함께 주어져 드러난다. 사유는 ‘존재자의 존재’라는 선행적 개현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존재를 ‘보살핌 안으로 수용하는 것(In-die-Acht-nehmen)’이고, 존재는 언제나 자기 개방의 장으로서 현존재의 수용 활동인 그런 사유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현은 존재와 사유의 공속이다. 아울러 존재는 인간과 함께 주어져 드러난다. 존재는 자신의 본질을 그 진리에로 보존하기 위해 인간을 사용하는 자(Brauchendes)이고, 인간은 존재가 자신을 개현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요구하는 거처(Sta촷te)로서 존재의 목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현은 존재와 인간의 공속이기도 하다. 이처럼 발현을 존재와 시간, 존재와 사유, 존재와 인간의 공속이라고 할 때, 그 공속(共屬, Zusammengeho촵en)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동일자(das Selbe)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것을 대비시켜서 그것들이 서로 같다고 하는 동등성(das Gleiche)이 아니라, 양자가 전체적으로는 하나를 이루면서도 그 속에서 각자의 고유함을 간직한다는 의미에서의 상호귀속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발현 속에서는 존재와 시간과 사유와 인간이 대비나 분열 이전에 이미 하나의 조화로운 결합 상태, 즉 미분화(未分化)된 공속 상태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공속성으로서의 발현 속에서 존재와 시간과 사유와 인간이 서로 근원적으로 속하면 속할수록, 서로는 각자의 본질에로 풀려남으로써 보다 더 고유한 것으로서 각자 본현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고유함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상, 각자는 서로에게 귀속된 어떤 유한한(endlich)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유한성은 무한성의 반대 표시가 아니라 필연적 상호 귀속이라는 관계성의 표현이다. 그런데 각자는 이처럼 유한한 것이기에, 어떤 것이 고유하게 드러나게 될 때, 그렇게 되어진 것은 드러나지만 그렇게 되게 한 것은 뒤로 물러나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존재가 ‘역사적 운명(Geschick, 歷運)’으로서 각 시기마다 주어질 때 존재 자신은 물러나고, 시간이 기재(旣在, Gewesen)로서 건네질 때 현재는 유보되는 것과도 같다. 발현에는 탈현(脫現, Enteignis)이라는 독특한 성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탈현을 통해서 발현이 포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탈현은 물러남과 유보를 통해 역운성과 현존성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는 점에서 발현 자체의 고유한 특색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발현으로서의 존재에 담긴 존재의 유한성은, 존재가 시간과 인간의 사유와의 관계맺음 속에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존재가 적어도 초시간적인 영원성이나 인간 외적인 초월자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이렇게 존재의 유한성을 시사해 주는 존재와 시간, 존재와 사유, 존재와 인간 등의 공속성은, 이들 양자가 분열 이전의 원초적 조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원초적 발현 사태의 입장에서 우리는 자연을 달리 바라볼 수 있다. 존재와 인간 사유의 공속성으로서의 발현은 양자가 동일자로 합일된 상태로서 형이상학적 표상작용상의 주객 대립 이전의 근원 사태이다. 주객으로 분리되지 않은 존재와 인간 사유의 공속적 발현에서는, 자연도 인간의 마음대로 처리될 수 있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본래 있는 그대로의 고유한 것으로서 비로소 드러난다. 즉 존재와 인간 사유의 공속적 발현은 존재자를 표상적 사유에 의해 장악 가능한 것으로 되게 하지 않으면서도, 존재자를 하나의 고유한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한다. 이런 발현을 통해서만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모든 경이 중의 경이를 퓌지스로서 경험할 수 있다. 퓌지스(physis)란 마치 장미꽃이 제 스스로 피어나듯이, ‘스스로 피어나면서 본질적으로 자신을 개현하는 것’ ‘개방된 장 안으로 자신을 현출하는 것’ ‘밝힘의 개현’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개현하는 것의 개현함에는 개현자와 개현 자체가 함축되어 있듯이, 퓌지스에도 ‘전체에서의 존재자 그 자신’과 ‘존재 자체’가 이중성으로서 결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존재자의 존재’로서의 퓌지스는 존재자와 존재함이 갈라지기 이전의 상태, 다시 말해 주관과 객관으로 표상화되거나 주어와 술어로 개념화되기 이전의 근원적인 원사태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장미는 왜 없이 존재한다. 그것은 꽃피기 때문에 꽃핀다.”고 하듯이, 퓌지스는 인간에 의해 처리 가능한 근거나 이유와 상관없이 제 스스로 드러나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퓌지스적 개현에 담긴 ‘존재자의 존재’라는 이중성이 망각될 때, 전체에서의 존재자는 자연적 존재자(physei onta)라는 영역 개념으로, 그리고 존재 자체는 존재자성(ousia)이라는 본질 개념으로 각각 축소 분화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발현이라는 원초적 사태 속에 담긴 중층적 상호 귀속의 성격에 따라 사물과 세계를 달리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 설 때, 사물(Ding)이란 공간을 점유하는 불가침투적인 물질의 덩어리도 아니고, 속성을 담지한 미지의 X도 아니다. 즉 그것은 표상 주관에 의해 앞에 세워지기를 기다리는 고립적인 대상이 아니라, 대지와 하늘과 죽을 자들과 신적인 것들 간의 복합적인 상호 관여물이다. 따라서 사물을 사물답게 하는 것은 그 사물에 영속적으로 현존하는 근본 성질이 아니라, 저 사중자(四重者, Geviert)의 회집(會集)이다. 이런 회집 속에서는 사중자의 어느 하나도 자체만으로 존립함 없이 서로를 반영하며(spiegeln) 상호 귀속되어 있다. 이렇게 사물이 사물로서 존재하는 것 중에 회집된 사중자의 통일이 바로 세계(Welt)이다. 다시 말해 세계란 대지와 하늘과 신적인 것들과 죽을 자들간의 겹침(Einfalt)이 일어나는 반영-활동(Spiegel-Spiel)이다. 따라서 세계는 단순히 우주 자연이나, 피조물의 집합이나, 존재자의 전체가 아니라, 모든 사물을 사물로서 설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장으로서, 모든 것을 회집하여 상호 귀속시키면서도 그것들에게 각자의 고유한 체류를 부여하는 회역(會域, Gegnet)과도 같은 것이다. 회역이란 이렇게 일자가 타자를 통섭하면서도 타자를 타자로서 허용하는 식으로 ‘사물을 사물로서 물화시키는 것(Bedingnis)’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회역이 지평으로서 우리를 둘러싸면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내보이고 있고, 인간이 근원적으로 회역에 속해 있는 이상, 인간은 그 본질상 회역에 내맡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유는 ‘회역에로의 내맡김(Gelassenheit zur Gegnet)’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유는 사물을 대상적으로 마주 세우는 표상도 아니며, 이렇게 대상을 향해 나아가 달려드는 표상이 곧 의욕인 이상, 사유는 또한 의욕도 아니다. 따라서 내맡김은 의욕하기를 단념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자를 자기 앞에 세워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장악하고자 의욕하는 표상적인 사유(das vorstellende Denken), 모든 존재자를 오직 주문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것의 형태로만 타당하도록 만드는 계산적인 사유(das rechnende Denken)에 대한 포기인 것이다. 이에 비해 회역에로의 내맡김을 감내하는 것이야말로 숭고한 마음(Edelmut)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면적으로 표상에 매달리거나 일방적으로 표상을 향해 내달리지 않는 숙고하는 사유(das besinnliche Denken), 발현으로서의 존재에 담긴 풍부한 시원성을 회상하는 사유(das andenkende Denken)에 대한 수용이다. 아울러 이렇게 사유하는 인간의 본질 역시 ‘회역에로의 내맡김’에 있게 된다. 인간이 이처럼 회역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내맡길 때, 그런 회역의 한가운데에서 비로소 사물이 사물로서 고유하게 드러날 수 있다. 또한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회역이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존재의 비은폐적 진리인 이상, 인간의 본질은 존재의 진리 속으로 ‘나가 서 있음(Hinausstehen)’, 즉 탈존(Ek-sistenz)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제 인간의 본질은 동물성과 이성간의 기이한 합성태(이성적 동물)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진리에 봉사하고 회역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것에서 찾아져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런 탈존을 자신의 본질로 할 때, 저 산도 퓌지스로서 제 스스로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인간과 존재가 원초적으로 공속하는 발현 사건 속에서는, 그 어떤 자연도 형이상학적 표상화에 의해 장악되지 않을 것이므로, ‘산은 역시 여전히 산이다’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