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하여 / 이제민 신부님

필부 2019. 1. 12. 11:53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하여 / 이제민 신부님 6.1. 부활을 밀알에게서 배운다. 한 알의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 없어져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밀알의 영생은 밀알이 썩어 없어진 곳에 맺힌 ‘이미 더 이상 씨앗이 아닌’ 열매에 있다. 영생을 바라는 인간은 밀알과 같은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가 땅에 떨어져 썩어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결국 밀알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영원한 삶(부활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자신을 죽여 없애는 삶을 살아라. 그때 인류는 나의 죽음 위에 영원하리라. 6.2. 영생을 위해서는 썩어 없어지지 아니하는 밀알로 미래에 다시 열매 모양을 한 밀알로 태어나기보다는 (또는 잠시 썩었다가 다시 그 밀알로 태어나려고 하기 보다는) 영원히 썩지 않는 씨앗으로 계속 남아 있으려는 집착을 없애야 한다. 그때 새로운 씨앗을 머금은 열매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다른 밀알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썩어 없어지는 것을 어떻게 영생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생긴다면 그것은 당신이 지금 얼마나 당신의 목숨에 집착하고 있는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당신의 목숨에 집착을 하고 있는 한, 당신은 당신의 목숨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목숨에 집착하는 한, 당신은 부활의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인류라는 미래가 나의 죽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미래를 위한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6.3. 대개의 사람들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물음만을 생각하고 거기서 미래의 열매가 맺어진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자기 시체가 다시 살아나 영원히 살 것만을 생각한다. 그런 영원은 없는데도 말이다. 7.1. 부활을 깨닫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과제가 있다. 앞에서 강조한 것처럼 씨앗의 죽음을 두고 서운해 하고 허전해 하는 마음을 먼저 죽이는 일이다. 집착으로 세뇌된 머리를 죽이는 것이다. 입력-저장-출력하는 기계 같은 우리의 차가운 사고를 죽이는 것이다. 그런 사고로는 부활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부활을 내 시체가 다시 살아나 영원히 나 홀로 잘 살겠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부활과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전혀 별개라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여기에 십자가의 의미가 주어진다. 7.2. 그분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는 부활에 이르는 길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십자가를 내려놓는 자는 부활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시사한다. 십자가를 진 자만이 골고타에 오를 수 있고 또 역설적이게도 부활한 자만이 십자가를 질 수 있다. 십자가는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반듯이 거쳐야 하는 길이다. 씨앗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듯이 땅에 뿌려져 썩어야 하는 아픔을 겪듯이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자만이 부활의 삶에 이르게 된다. 7.3. 우리가 십자가를 내려놓으려고 하는 것은 내 생명에 대한 집착과 이로 인한 남에 대한 무관심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만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려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구세주를 자기 안에 가두어 두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에겐 인류에 대한 사랑이 없다. 우주에 대한 사랑이 없다. 인류의 구세주를 자기만을 위하여 자기 안에 가두려는 것처럼 모순도 없다. 그러기에 부활을 기다린다면서 이기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것처럼 모순도 없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또 내가 그 믿음 안에서 부활하리라는 것을 믿는 것은 내 온 몸을 예수님처럼 온 인류를 위하여 바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처럼 우주의 영생을 기원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진 자는 자기가 아니라 남, 나아가 우주를 위하여 산다. 그는 인류의 생명, 우주의 생명으로 새로 태어난다. 그는 인류의 구세주 우주의 구세주가 된다. 7.4. 인간만이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를 수 있고 인간만이 살아 있으면서도 남을 위하여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개나 돼지는 자기를 죽일 수 없어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한다. 남을 위하여 희생할 줄 모르는, 오로지 자신의 평화만을 위하여 이기적으로 사는 인간은 부활할 수 없다. 자기만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그 목숨을 버리도록 하라.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영생에 이르는 길은 좁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그 버린 목숨으로 살아보라. 당신은 당신이 새 생명으로 태어남을 온 몸으로 느낄 것이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삶의 지평을 바라보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곧 부활이다. 그때 당신은 그분처럼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우리가 그분의 부활을 믿는 것은 이 시점에 도달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그분의 부활을 믿는 것은 우리도 그분처럼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첨언: 평화신문에 게제된 마산교구 1월 11일자 사제인사에서 신부님께서 원로사목자로 발표되시었다. 원로사목자라 지칭함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으나 우선 그 동안 사목활동을 오랜동안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셨다라고 하리라. 신부님께서도 감회가 남다르시리라. 다른분들과 달리 신부님께서는 서적의 글이랑을 통한 교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믿음을 주셨으니. 쉼보다 더 큰 일이 신부님게 주어진 것이라 생각되어 진다. 아무튼 그 동안 수고하시고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