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활의 삶을 살기 위하여 / 이제민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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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삶을 살기 위하여 / 이제민 신부님 1.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올바로 정리 파악해야 할 개념들이 많다. 복음화, 선교, 믿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 일치, 평신도, 하느님 등 우리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이러한 개념들은 어쩌면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은 수난을 받고 있는 개념들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사고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 개념들을 이용할 때가 있는가 하면, 자기가 알아들은 범주 내에서 이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이 개념들이 본래 뜻하고자 한 바와는 달리 사용될 때가 많다. 부활도 그 중 하나이다. 부활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우리도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고백하지만 실상은 부활에 대한 환상만을 키울 뿐 예수님의 부활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보니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도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작년에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고백하였고 금년에 또 그분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하여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그만큼 부활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부활 축제 기간 말고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내 삶이 무슨 관계인가? 그분께서 부활했다고 믿고 고백한다고 내 삶에 달라지는(진) 것이 있는가? 부활에 대한 신앙이 내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가? 작년과 비교해서 지금, 영세 전과 비교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고백하게 된 지금 내 인생에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부활이 내 인생에 주는 의미는 무엇이며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영세한 후 내 인생에 달라진 것이 없다면, 그분의 부활이 내 머리에 입력된 교리로만 남아 있다면 부활에 대한 나의 신앙고백에는 문제가 있다. 내 죽은 다음 언젠가 다시 일어나 살게 되리라는 환상만을 일으켰을 뿐이고, 사람이 죽으면 부활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로 혼란스런 논쟁만을 일으켰을 뿐, 내 삶을 변화시키는 고민을 하도록 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분의 부활을 옳게 이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주어진 과제이다. 2.1. 이 과제는 부활에 대한 지금의 내 생각을 바꿀 때만 채워진다. ' 부활에 대해 입력된 기존의 내 생각을 죽일 때 나는 비로소 부활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생각을 바꾸어라. 이 생명이 끝난 다음 다시 무덤에서 일어나 영원히 살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살아 있는 지금의 내 삶이 부활의 삶으로 바뀌게 하라. 그렇다면 부활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활에 대한 사고를 바꾸기 위해 우선 지금까지 나는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조용히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부활하신 그분의 모습을 그려 보라. 그리고 부활한 내 모습을 그려보라. 부활하신 그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부활한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내가 그린 그 그림을 보면서 다시 자문해보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정말 내가 그린 모습으로 지금 천국에 계실까? 나는 정말 내가 그린 모습으로 부활하여 살게 될까? 그런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 사는 날이 정말 내게 올까? 언제 나는 그런 모습으로 살게 될까? 2.2. 내가 그린 그림을 계속 들여다보자. 부활하여 내가 살게 될 곳을 어떻게 그렸는가? 그곳에도 봄이면 종달새가 지저귀고 만물이 파릇해지고 꽃을 피울까? 그곳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차례로 올까? 가을에는 단풍이 들고 겨울에는 낙엽이 떨어질까? 계절의 변화가 있을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대로 거기는 항상 봄이고(또는 항상 가을이고) 꽃은 지지 않고 항상 피어있을까? 그리하여 꽃봉오리는 결코 꽃이 될 수 없는 영원한 꽃봉오리로 나무 가지에 달려있을까? 내가 부활한 다음 가게 될 그곳에도 새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헤엄을 치며 개가 인간을 따라 다닐까? 천국에 새가 있다면 그 새들은 어디서 날아 왔으며 그 개는 어디서 왔을까? 처음부터 거기 천국에 늘 있었을까? 아니면 나처럼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온 것일까? 그 개가 부활한 개라면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온갖 짐승들도 언젠가는 부활할까? 2.3. 아니,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희망이 없는 세상이기에 죽어서라도 잘 살아보자는 것인가? 이런 질문은 시체의 부활을 어느 정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고작 시체가 다시 살아나 영원히 사는 정도인가? 그 소생이 우리의 인생의 목표일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삶이 죽음 다음에 오는 삶에 초점을 맞춘 것일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미지의 환상의 세계에 ‘믿음을 내세워’ 내 실존을 맡겨도 좋은 것일까? 시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희망이 과연 이 어려운 삶을 견디어 내게 하는 힘일 수 있을까? 첨언: 다시 이제민 신부님의 글을 옮긴다. 성탄시기에 부활의 논함을 듣는다는 것이 때에 걸맞지 않을련지도 모른다. 그러니 주님의 오심을 감사하고 축복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를 이끄시어 구원에 이르게 함에서 오는 기쁨이 아닐까? 오늘부터 강추위가 오신다 한다. 숨을 죽이듯 이불을 둘러쓰고 이 순례의 끝을 발밟어 보자. 신부님께서도 우리가 귀기울여 따름에 즐거워하실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