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가을타는 여인을 바꿔주세요

필부 2018. 11. 14. 22:15

가을타는 여인을 바꿔주세요 여보세요! 여기는 가을나라인데요. 거기 어부림인가요? 눈이 젖은 여인이 계시나요? 가을타는 그 여인을 바꿔주세요. 댁이 가을앓이로 몸살을 하시나요? 계절 탓이 아니라 나이가 가을이시다는 말씀이시군요. 인생에도 四季가 있어 가을인데 나뭇잎이 얼굴을 붉히는 가을을 맞은 셈이라고요. 쓸쓸하신가요? 슬퍼하고 있습니까? 한바탕 울기라도 하면 후련해질 것 같은가요? 소리내어 울 수가 없으니 눈물만이라도 떨구고 싶은가요? 하루에도 열 두번 열차표를 끊어 막상 갈 곳은 없지만 작은 가방 하나 챙겨 집을 떠나 어디론가 흘러가고 싶은가요? 그냥 이대로 어데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기도 하십니까? 수신인을 정하지 못해 따로 우표를 붙일 일 없는, 그냥 쓰기만 해도 좋을 편지를 쓰고 싶은가요? 밤을 지새우며 쓰고 또 써도 못다 풀 아픔이 있나요? 이 가을 내내 삭이지 못할 애절한 사연이 있으시다고요? 전화기 곁에 가면 아무에게라도 전화를 걸고 싶으신가요? 혹 전화를 걸어 그 누가 받으면 잘못 건 전화라고 시침을 뗄지라도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그리움이 간절하게 일렁입니까? 휴지같은 사연이라고 그 옛날에 지워버린 얼굴이,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얼굴이 새삼스레 떠올라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가요? 보고 싶고 보고 싶어, 못내 아쉬운 그리움으로 그 얼굴이 죽도록 절실해 지시나요? 남 볼새라 조심스럽게 가슴에서 꺼내들고 미워하고, 때려주고, 꼬집다가 다시 가슴에 껴안고 안타까워 하시는지요? 가슴이 다 타버려 숯검정이 되었다고요? 어찌 이 가을을 견뎌낼지 모르겠다고요? 텅빈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야 가슴이 따뜻해질지 알 수가 없다고요? 세월이 허무해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요? 저는요. 가을나라에 사는 남자입니다. 봄도 없고 여름도 없이 가을만 존속하는 세계에서 제가 삽니다. 거기다 아침도, 한낮도 없이 노을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가을물이 든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사는 곳이 가을나라입니다. 단풍에 물든 잎새들이 꽃으로 피고 나비가 되어 날다 힘이 다하면 땅 위에 누어 숨을 고르곤 한답니다. 차마 그 위를 밟지 못하기에 서둘러 걷는 법이 없지요. 모든 게 느리기만 해서 슬픔도 게을리하죠. 슬픔은 일상적 사항이라서 시선을 둘 이유도 별로 없지요. 그리워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요. 쓸쓸하고 외로운 감정은 익숙한 것이랍니다. 어쩜 그립고 허전해서 눈물짓는 슬픔을 즐기며 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습관이 추억 더듬기 같은 것이기에 모두를 수용하고 허락한답니다. 슬퍼지면 슬퍼하고, 울고 싶으면 목을 놓고 울어도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랍니다.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보고 싶으면 만나보고 전화를 하고 싶으면 전화를 걸죠. 참고 싶다면 이 모두를 참아버리는 거고요. 가을이기 때문입니다. 가을이기 때문에 소유로 무겁거나 무소유로 가벼워지는 일이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차이가 없습니다. 보는 눈의 시각에 따라 뒤바뀌어 집니다. 가을나라에선요. 행복하고 싶은 사람은 행복하고요.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불행하게 산답니다. 본인에게 선택을 하라고 하였답니다. 가을 다음엔 침묵이기 때문입니다. 제 이야기가 정답다고요. 다시 통화했음 좋겠다고요?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요? 그것도 좋겠지요. 허나, 가을이 지나면 눈이 내리는 겨울이라서 모두 눈을 감고 잠이 들텐데 부질없는 일이 되겠죠. 제가 누군지 궁금합니까? 알고 싶다고요? 저는 거울입니다. 인연이라는 한가닥 정체 모를 바람이지요. 변하고 변하므로 연기 같은 사람이죠. 나도 나를 모르거든요. 그러니 오늘 통화로 만족하셔야 돼요. 그리고 잊으셔야 해요. 아셨죠? 통화가 길었습니다. 암튼 인연이 닿으면요. 그렇다면 다시 통화하죠. 재작년, 작년, 금년에도, 매년 이렇게 가을마다 거는 전화이니 당신이 다시 받을지 누가 아나요. 그럼 그 때는 인연이 아니라 숙명이라고 인정할게요. 아무쪼록 행복하세요. 안녕!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