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슬라우스 보르스의 "인생의 의미는 죄에 대한 저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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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의미는 죄에 대한 저항에 있다. 눈에 띄지 않으나 하늘나라의 완성으로 이끌어 주는 태도는 사랑으로 시작되는 헌신적 희생에 있다고 했는데, 바로 그런 태도의 우리 삶 속에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죄 때문만이 아니라, 거의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본연의 우리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비본래적인 삶을 살아가는 진기한 현상 때문입니다. 그런 현상을 저는 시험적으로 ‘인생의 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인간 존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융통성을 잃게 되고, 그 대신 고집스럽고 완고하게 되어, 수용할 줄 아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빼앗깁니다. 이렇게 비본래적인 삶 쪽으로 발걸음을 조금씩 옮기면서도, 그때마다 속으로는 그렇게 사는 것이 정당하고 좋은 일이며, 심지어 그리스도교 정신이 요구하는 일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내적 와해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이룬 업적과 생활습관에 자족하는 인간, 자신을 꾸미고 가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가는 인간, 더 넓고 풍요로운 세계를 꿈꿀 줄 모르는 인간, 무엇을 잃지 않을까 또는 무엇을 더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만 늘 사로잡혀 있는 인간, 자기의 이익을 안중에 두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이러한 어두운 상태는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죄를 하나도 짓지 않았어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인생의 죄는 엄청나고 극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내할 줄 모르는 마음, 거친 자세와 말투, 남 말하기를 일삼고 남의 결점을 헐뜯기 좋아하는 습관,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일들 속에서 드러나는 속 좁은 이기심, 한번 틀어지면 좀처럼 용서할 줄 모르는 꽁한 마음, 거짓과 가식, 다른 사람과 그들의 영적 삶에 대한 경외심 상실, 질투와 악의, 변덕스러움, 무질서한 생활, 마음에 드는 사람만 편애하는 집착, 성급한 판단,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귀 기울일 용기를 가지지 못하는 거짓된 자기만족.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 사이에서 인생의 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모든 것과 그 밖에도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큰 죄를 지었을 때 그 사실을 시인하고, 그 죄를 통회하고, 고해성사를 보고, 그로써 이제 모든 것이 말끔히 정리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하고 더 부끄러운 것은 소위 소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흔히 그것은 사람을 완전히 녹초로 만들고, 대죄를 짓는 것만큼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살다보면 실존적 나약함으로 인해 전적으로 투신하거나, 자신의 내적 기본 결단을 실천에 옮기거나, 자신의 ‘전반적 의무’를 밖으로 드러내어 이행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개별 인간의 내적, 인격적 핵심이 드러나고, 그의 운명을 담고 있는 근원적인 부분이 표출되는데도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소죄 개념에 편입시키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이 어쩌면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행위, 갈 데까지 가버린 비겁, 은폐된 사랑 부재의 약한 표현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존재의 밑바닥으로부터 이미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의 기본 결단을 이미 하느님 반대쪽으로 내렸는지 모릅니다. 예전에 순진하게 생각하던 시절에 그런 삶도 별로 나쁠 것이 없다고 위안을 주었는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우리는 완전히 거짓으로 덧칠된 삶을 사는지 모르며, 완전히 자기 자신만의 철옹성에 갖혀 사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나 우리 인생의 유혹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납니까? 그리스도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을 고행으로 삼지 않으려는 저 존재의 어둠이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그것이 분명해지면 지옥, 연옥, 심판 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분명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라디슬라우스 보르스의 "죽은 후에서는..." 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죄속에 파묻혀 사는지도 모릅니다. 크고 작은 죄들로 인해 절망해 버리는 자기포기나 적당한 자기타협에 의한 현실적응도 문제지만 별 게 아니라고 지나치는 소죄들로 인해 스며들며 젖는 물에 침몰해버리는 좌초가 더 큰 일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분명 주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가 견딜만하고 이겨낼 수 있을 만큼만의 고통을 허락하셨을 겁니다. 허용하신 세상 안에서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적 삶을 살아라 하셨을 겁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주님과 함께함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 세상의 순례를 통해 주님의 나라에 당도하길 우리보다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이실 겁니다. 사랑하시기 위해 사랑받을 존재로 우리를 빚어주셨음을 믿고 기도하는 삶이 되게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