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3. 사랑의 대상 e. 신에 대한 사랑 3)

필부 2010. 5. 28. 17:53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3. 사랑의 대상 e. 신에 대한 사랑 일신론의 사상이 성숙해 감에 따라 그 결과는 결국 신의 이름을 말하지 말고 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이때 신은 일신론적 신학에 있어서 잠재적으로 가능한 것, 곧 현상적 우주의 기초에 있는 통일성, 곧 모든 존재의 근거를 가리키는 이름 없는 일자,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침묵자가 된다. 곧 신은 진리가 되고 사랑이 되고 정의가 된다. 내가 인간적인 한, 신은 나이다. 신인동형의 신으로부터 순수한 일신론적 원리에로의 이러한 진화는 신에 대한 사랑의 본성에도 온갖 차이를 생기게 한다는 것은 매우 명백한 일이다. 아브라함의 신은 아버지로서, 때로는 그의 용서가, 때로는 그의 노여움이 지배적인 측면이 됨으로써 사랑받을 수도 있고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신이 아버지인 한, 나는 어린애이다. 나는 전지전능에 대한자폐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는 아직도 인간으로서의 나의 한계, 나의 무지, 나의 무력함을 깨닫는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어린애처럼 나를 구해주고 나를 지켜 주고 나에게 벌을 주는 아버지, 내가 복종할 때 나를 좋아하고 내가 찬미하면 기뻐하고 내가 복종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적 발달에 있어서 이러한 유아적 단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일이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신에 대한 신앙은 도움을 주는 아버지에 대한 신앙 - 유치한 환상이다. - 이다. 이러한 종교의 개념은 몇 명의 위대한 인류의 스승들에 의해,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아직도 종교의 지배적 형태이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프로이트의 신의 관념에 대한 비판은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일신론적 종교의 다른 측면과 일신론적 종교의 참된 핵심 - 이 참된 핵심의 논리에 따르면 정확하게 이러한 신 관념의 부정에 도달하게 된다 - 을 무시했다는 것은 잘못이었다.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만일 그가 일신론적 관념의 본질에 따른다면, 어떠한 일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고 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어린애가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듯, 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는 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그의 한계를 느끼고 있어서 겸손하다. 그에게는 신은 인간의 진화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 인간이 갈망하던 모든 것, 곧 정신 세계의 영역을 나타내는 상징이고 사랑과 진리와 정의의 상징이다. 그는 신이 대표하고 있는 원리를 믿고 있다. 그는 진리를 생각하고, 사랑과 정의에 따라 살고, 그의 인간적 힘 - 중요한 유일한 실재로서의 궁극적 관심의 유일한 대상으로서의 힘 - 을 더욱 충분하게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에만, 그의 전생애는 보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그는 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그의 이름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을 사랑하는 것은, 만일 그가 계속해서 이 말을 사용해야 한다면, 사랑할 줄 아는 충분한 능력의 획득, 신이 스스로 그의 편이 되어 주는 일의 실현을 갈망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일신론적 사상의 논리적 귀결은 신에 대한 학문, 곧 신에 대한 지식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근본적인 비신학적 견해와 예컨대 초기의 불교나 도교에서 볼 수 있는 비유신론적 체계에는 차이가 있다. 모든 유신론적 체계에서는, 심지어 비신학적, 신비적 체계에 있어서조차도, 인간을 초월해 있고 인간의 정신적 힘 및 구원과 내적 탄생에 대한 인간의 갈망에 의미와 타당성을 부여하는 정신의 왕국의 실재를 가정하고 있다. 비유신론적 체계에는 인간이 밖에 있거나 인간을 초월해 있는 정신의 왕국은 없다. 사랑, 이성, 정의의 왕국은 오직 인간이 이러한 능력을 자기 자신 속에서 인간의 발달의 과정을 통해 발달시킬 수 있기 때문에, 또한 그 정도에 따라 현실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삶에 부여하는 의미 이외에는 삶에는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돕지 않는 한, 전적으로 외롭다. 신에 대한 사랑을 다루어 왔지만 나 자신은 유신론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 나에게는 신 개념은 역사적으로 제약되어 온 관념 - 이 관념으로 인간은 역사적으로 주어진 시기에 있어서의 인간의 보다 높은 능력의 경험, 진리와 합일에의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 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해 두고 싶다. 그러나 나는 엄밀한 일신론의 결론과 정신적 실재에 대한 궁극적인 비유신론적 관심은 비록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싸울 필요가 없는 두 견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신에 대한 사랑의 문제에 대해 또 하나의 다른 국면이 제기되며 이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국면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동양(중국과 인도)과 서양의 종교적 태도의 근본적 차이에 언급하고 있다. 이 차이는 논리적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아리스토 텔레스 이후로 서양 세계는 아리스토 텔레스 철학의 논리적 원리를 지켜 왔다. 이 논리학은 A는 A라고 하는 동일률, 모순률(A는 비A가 아니다) 및 배중률(A는 A이면서도 비A일 수는 없고 A도 아니고 비A도 아닐 수는 없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음의 문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입장을 매우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동시에 동일한 관련에서 종속하고 동시에 종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변증법적 반대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가 어떠한 다른 구별을 첨가하든, 이러한구별을 첨가할 만하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원리 중 가장 확실하다.(19)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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