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 / 朴正根 2. 副題에 대한 반성 (2) 지극한 사람은 '나'라는 것이 없다[至人無己]
아름다운 삶 / 朴正根 -개인의 완성에 대한 중국철학적 접근- 2. 副題에 대한 반성 (2) 지극한 사람은 '나'라는 것이 없다[至人無己] 도가道家의 사람들은 도道에 산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도를 행하지는 않는다. 도를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밥 먹고, 잠자고, 또 친구를 만나기도 하며 우리들 보통 사람들이 사는 모습대로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가의 진짜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산다. 배운다 함은 매일 보태가는 것이요, 도를 행함은 매일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행함이 없음에 이른다. 행함이 없으면서 행하지 아니함이 없다. 도대체, '행함이 없으면서 행하지 않음이 없다'란 무슨 말인가? 어쩌다 한번쯤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깜빡 잠이 들었어!", "정말 화가 났어!", "웃음이 터져 나왔지!", "눈물이 쏟아져 나오더라고!" 등등의 경우에 그렇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나'를 찾음으로써 일을 만들어서 한다. 그럴 때 앞에서 인용한 말들은 다음처럼 변질된다. "깜빡 잠을 잤어!", "정말 화를 냈지!", "웃음을 터뜨렸지!", "눈물을 쏟아 냈다구!" 등등으로. 이런 경우는 앞의 경우와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즉, '내'가 행위의 주체가 된다. 상대적으로, 앞의 경우 결코 내가 행위의 주체가 된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도가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있다. 도가의 지인至人은 화가 나는 경우는 있어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 지인至人은 잠이 들지, 잠을 자지는 않는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일은 있어도, 웃음을 지어내거나 웃음을 터뜨리지는 않는다.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일은 있어도, 눈물을 쏟아 내거나 눈물을 (짜)내지는 않는다. 우리가 어린 시절 우리 자신에게서 일어났거나, 혹은 주변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어린아이와 엄마의 조금 이상해 보이는 대화를 한 가지 예로 더 들어보자; 어린아이가 울면서 들어오자, 엄마가 물었다: "왜 우니?" 아이가 대답했다: "물에 빠졌단 말야! 잉 잉 " 엄마가 말했다: "뭐? 누가 물에 빠져?" 아이가 대답했다: "내가 물에 빠졌단 말야! 엉 엉 " 엄마가 말했다: "뭐? 왜 네가 물에 빠져? 누가 널더러 물에 빠지라고 했어!" 아이가 울면서 말했다: "엉 엉 , 아니야! '내가 물에 빠진 게 아니고, 물에 빠진 게 나야!' 엉 엉 , 엄마는 모르면서 ...!" 그렇다. '내가 물에 빠졌어!'와 '물에 빠진 게 나야!'와의 사이에는 미묘하고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래서, 도가의 지인至人은 말한다. "엄마는, 사람들은 모르면서, 내가 물에 빠진 게 아닌데 내가 물에 빠졌다고 한단 말이야, 사실은 물에 빠진 게 나인데!" '행함이 없으면서 행하지 아니함이 없다'란 말의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도가의 관점에서 볼 때, 삶의 주재자는 내[我]가 아니다. 삶은 도의 흐름이고, 도의 드러남이다. 단지, 그런 것이다. 지인至人은 잘 자고, 잘 놀고, 잘 웃고, 때로는 잘 울고, 잘 물에 빠진다. 그렇지만, 지인에게 있어서는 '잠이 들은 것'이지 '잠을 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함이 없으면서도 행하지 아니함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잘' 자고, '잘' 놀고, '잘' 웃고 등등에서 '잘'의 의미는 일상적 의미의 '잘'과 미묘하고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지인은 '잘' 하는 것이 없다. 그것은 '도의 흐름'일 뿐이다. '도의 흐름'에 '잘' 흐름, 혹은 '잘못' 흐름은 없다. 그래서 지인은 '잘' 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잘'이 아닌 '잘'이다. 그래서 진짜 '잘'인 '잘'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나이가 들어, 이빨이 빠지고 흰 머리카락이 생긴다고 할 때, 이빨이 스스로 빠지고 머리카락이 스스로 하얘지는 것인가? 아니다. 빠질 만 하면 빠지는 것이 이빨이고, 하얘질 만 하면 하얘지는 것이 머리카락이다. 어찌 이빨과 머리카락만 그럴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다. 일단 몸을 받았으므로 목숨을 해치는 일 없이 다할 날을 기다리자. 겉모습이 늙어 감에 따라 그 마음도 따라 찌들어 버리니 큰 비극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삶이란 진정 이렇듯 무지몽매한 걸까? 꼭 나만 혼자 어리석고 다른 사람들은 어리석지 않은 것일까? 산다는 것은 왜 이런 것인가? 삶이 바로 그런 것이지, 왜 그런지는 모른다. 그저, 그런 것이다.[道法自然] 그리고, 그저 그런 것인 줄 알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도道의 사람이다. 옛날 참사람은 삶을 즐거워 할 줄 몰랐고, 죽음을 싫어할 줄 몰랐다. 태어남이 기쁘지도 않고 죽음이 두렵지도 않다. 그저 가고 그저 올 뿐이다. 그 시작한 바를 잊지 않고 그 끝날 바를 구하지 않는다. 받으면 즐기고 잃으면 돌아간다. 이것을 일러 마음으로 도를 버리지 않고, (마치 무엇이나 된 양) 하늘을 도우려고 들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사람을 참 사람이라고 한다. 삶이 그렇게 왔다가 가는 것인 줄 알면, '나[我]'라는 것은 결코 벗어나야 할 굴레가 아니며, 동시에 완성시켜야 할 어떤 미완未完의 것도 아니다. 빔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하게 하라. 온갖 것이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뿐이다. 대저 온갖 것은 풀처럼 쑥쑥 자라지만 모두가 결국에는 각기 뿌리로 돌아갈 뿐이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이것을 또 일컬어 명으로 돌아간다 한다. 명으로 돌아감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늘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어 흉을 짓는다. 늘 그러함을 알면 온갖 것을 포용하게 되고 포용하면 공평하게 되고 공평하면 천하가 귀순한다. 천하가 귀순하면 하늘에 맞고, 하늘에 들어맞으면 길에 들어맞는다. 길에 들어맞으면 영원할 수 있다.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다. 여기서 '뿌리로 돌아간다'는 말의 의미는 결코 우리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감을 두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초목草木의 경우에도 또한 그렇다. 우리는 흔히 초목이 '흙에서 나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사실 초목은 한시도 흙을 떠나는 법이 없다. 언제나, 흙과 하나이다. 우리의 삶 역시 그렇다. 우리의 삶은 도에서 나오는 것이고, 죽음은 다시 도道로 돌아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은 도를 보다가 죽은 뒤에는 오히려 그 도를 보지 못하고 잃게 될 것이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도와 나[我]의 관계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二而一, 一而二]'인 그런 '무관계성無關係性의 관계'이다. 우리는 도道를 떠난 적이 없다. 그래서, 도 밖에 '어떤 것'이, '내[我]'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돌아감을 볼 뿐이다'란 말 또한 노자老子의 말임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노자는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바보가 되는 그런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말은, 말이며 동시에 침묵이다. 우리가 "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란 노자의 말을 침묵으로 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노자가 결코 어리석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돌아감을 볼뿐이다'란 말도 침묵으로 들을 수 있다. 그 말속에는 '나'도, '돌아감'도, '봄'도 없다. 그 말은 단지 도의 흐름을 보여주는 침묵이다. 지인至人만 무기無己인 것이 아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나아가서 그 무엇도 자기自己가 될 수 없다. '나'를 내세울 수 있는 경우는 단지 두 가지의 경우가 있을 뿐이다. 한 경우는 도道에서 떨어져 나온 경우인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다른 한 경우가 유일한 경우인데, 바로 도와 하나가 된, 다시 말해 도인 경우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오직 도 하나인 경우 무엇이 무엇을 무엇에게 내세울 수 있을까? 그렇기에, 또, 오직 지인至人만이 도와 하나임을 앎으로써, 나[我]를 잊을 수 있는 나[吾]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吾]'는 결코 개인個人인 '내[我]'가 아니며, 그 말은 말이며, 동시에 침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