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 / 朴正根 2. 副題에 대한 반성
<blockquote> <pre> <p style="line-height:200%; margin-left:0;"><font size=2 face=바탕체>
<b> 아름다운 삶 / 朴正根 </b>
-개인의 완성에 대한 중국철학적 접근-
2. 副題에 대한 반성
앞장에서, 우리는 삶의 뿌리와 삶의 소중한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현주소는 삶의 뿌리를 망각한 채 표류하고 있으며,
삶의 놓칠 수 없는 부분인 밥맛마저 모르는 상태임을 상기시킨 바 있다.
앞장에서 지적한 것들이 너무도 당연한 얘기인지
혹은 중국철학적 분위기에 푹 젖은 한 사람의 주관적 소견인지 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자각하고 있든
혹은 그렇지 않든 어떤 면에서이든지간에 삶의 미흡한 점을 갖고 있고,
그것을 채우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동서고금에 별 차이가 없으며,
지금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개인의 완성完成'이라는 부제副題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 우리들은 '개인의 완성'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개인의 완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이 그 말의 의미를 사용자의 의미대로 파악한다는 얘기가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이 글에서 부제로 쓰고 있는 '개인의 완성'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적어도 중국철학적 관점觀點에서, '개인의 완성'이라는 말은
그 말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어울리지 않는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말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왜곡시키거나,
아예 가려 버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개인의 완성'이란 말의 의미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완성'이라고 볼 때,
앞장에서 잠깐 보았듯이 삶이 하나의 전체적인 큰 덩어리라고 보는 중국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한 사람의 삶이 완성될 때, 그때 드러나는 그 한 사람은
이미 그 한 사람이 아닌 모든 것과 하나가 된 '한 사람'이므로 결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인'이라는 말을 가지고는 그 진의가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완성'이란 말이 적절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완성'이라는 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선 삶과 완성이란 두 말이 서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삶을 하나의 큰 덩어리로 본다고 할 때, 삶에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따라서 완성이라는 것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인과 완성을 결합시키면 더욱 이상한 말이 된다.
'개인의 완성'은 '개인의 삶의 완성'을 뜻하게 되는데,
개인의 삶의 완성은 개인의 삶이 전체적인 삶과 하나가 되어,
(어떤 의미에서) '개인이 사라짐'을 뜻한다.
개인이 사라져 버리는데 어디에서 '개인의 완성'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혹 이런 반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석가釋迦와 마주 대하고 있다고 가정할 때,
'여기 완성된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에 대한 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만약, 우리가 석가와 마주 대면해 완성된 한 사람을 본다면, 그것은 석가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고,
살아 있는 석가를 송장으로 만드는 격이다.
석가와 대면할 때, 당연히 그 사람에게서 완성의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완성은 매 순간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완성이지,
결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완성完成, 완전히 이룸'은 아닌 것이다.
석가가 우리에게 주는 완성의 느낌은 우리가 석가와 직접 대면하든 않든 같은 것이고,
그래서 석가인 것이다.
석가가 이룬 완성(?)은 석가의 생존시나 지금이나 다름없고
또 앞으로 이어져 갈 것이기에 결코 완성이 아니다.
이제 '부제副題'가 갖고 있는 문제들을 다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