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 / 朴正根 1. 삶의 현주소

필부 2008. 3. 4. 01:03
 

아름다운 삶 / 朴正根 -개인의 완성에 대한 중국철학적 접근- 1. 삶의 현주소 즐겁고 마음 편한 삶이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인가? 우리가 매일 매일 대하는,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서 보는 이 사회의 단면들은 그토록 어지럽고 살벌하다. 또,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 역시 바쁘디 바쁘고 일이 많아, 산다기 보다는 삶에 쫓기는 모습이다. 나 또한 그런 모습이다. 이제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밥술은 먹을 만한 세상이라고 하는데, 왜 즐겁고 여유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것일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만 유독 무엇이 잘못 되었단 말인가? 아니, 결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동서고금, 어느 때 어디에서나 삶은 늘 그렇게나 힘들고 살기 어려운 것이어서 유유자적하며 삶의 길을 즐기면서 편안하게 산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이 찾아보기 힘들었음에 틀림없다. 이제 그런 단서들을 잠시 살펴보자. (1) 밥맛도 모르는 삶 사람이 살면서 밥 먹고 물 마시는 일은 그야말로 삶과 직결되는 것이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 산다. 그런데 만일 밥맛이 없다면 살맛이 얼마나 나겠는가? 우리 모두가 그 점을 잘 알기에 '밥맛도 없다'란 말을 '사는 맛이 없다'란 의미로 쓰고 있다. 또, 거꾸로 사는 맛이 없는데, 밥맛이 날 리도 만무하다. 그럼에도, 정작 삶 속에서 우리가 늘상 듣고, 쓰는 말은 결코 '밥맛이 돈다'나 '밥맛이 난다'가 아니라, '밥맛도 없다'란 말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옛날 사람들도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였나 보다. 누구나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그 맛을 아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이 말은 공자孔子가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심히 안타깝게 여기면서 마치 넋두리라도 하듯이 한 말이다. 그 어마어마한 도道, 하늘과 같은 도, 그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왜 얼토당토않게 '밥맛'을 끄집어내었을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다. 공자의 이 말은 '밥맛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란 뜻이 아니다. 결코 '밥맛조차'가 아니라, '밥맛을'이다. 밥을 먹는 것은 삶에 있어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밥 먹는 것만도 감지덕지感之德之 한다'란 말은 크게 잘못된 말이다. 밥을 먹음, 밥을 먹을 수 있음이 바로 삶의 맛이요, 기쁨이다. '숨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란 말도 똑같이 잘못된 말이다. 숨쉼은 곧 살아감이며, 어떤 다른 행복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중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사유의 전환이 필요하다. 삶에 있어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돌이켜보아야 한다. 열자列子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집안에 3년 동안 처박혀 있으면서 한 일이 밥 짓고 돼지를 사람처럼 먹여 키운 일이다. 열자가 돼지 먹이기를 사람 대하듯 했다는 말은 열자가 정신이 나갔다는 말이 아니다. 돼지 안에서 움직이는 도의 흐름을 보았고, 그 생명의 흐름이 나의 생명과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님을 보았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열자는 도를 얻게 되었다. 열자는 스스로 배움에 입문하지도 못했다고 여기고 집으로 돌아가 3년 동안 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를 사람처럼 먹여 키웠다. ... 먹는 것은 바로 삶의 일부분이다. 그런데, 그 먹는 맛을, 다시 말해 사는 맛을 모르면서 사는 맛을 찾으려 한다면, 그렇게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들은 사는 맛을 멀리서 찾는다. 그래서, 그렇게 바쁘고 고생스럽게 살면서 밥맛도 없어 한다. 물론 먹는 것이 삶 전체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마치 먹는 것이 삶 전체인 양 달려드는 사람도 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을 위해 공자는 또 이렇게 말했나 보다. 군자는 도를 도모하고 먹는 것을 도모하지 않는다.[君子謀道不謀食.] 먹기 위해 산다면 밥맛이 제대로 날 리가 없고, 따라서 사는 맛도 제대로 날 리가 없다. 제대로 사는 사람이라야, 밥맛도 알고 그래서 또 살맛이 나는 삶을 산다. 맨밥 먹고 맹물 마시고 팔꿈치로 베개삼더라도 그 안에 또한 즐거움이 있도다.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지금까지 우리 또한 사는 맛도, 밥맛도 모르고 살아왔다고 해서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사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았고, 살고 있다. 그러나, 밥맛마저 모를 정도로, 사는 맛을 놓치며 살고 있다면 정말 정신 빠진 삶이 아닐 수 없다. 밥맛을 모르는 것은 결코 혀 때문이 아니라 삶에 대한 오해와 무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라도 마음을 가다듬어 밥맛을 찾고 삶의 즐거움을 느껴 보자. 그러나, '밥맛이라도 찾아보자'여서는 결코 삶의 맛을 찾을 수 없다. 밥맛을 찾아야 한다. (2) 뿌리를 모르는 삶 사람들은 저마다 '나의 존엄'과 '나의 행복' 그리고 '나의 자유'를 외치며 그것들을 성취하려고 야단들이다. 남에게 뒤질세라 남보다 조금이라도 앞서려고 안간힘을 쓴다. 저마다 자유와 개성을 내세우며 남들은 안중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남'들에게, 나아가서는 '나 아닌 것 모두'에게 의존적이다. 또 나의 삶은 나 아닌 모두의 삶과 상호의존적이다. 그러므로, 내 삶의 의미는 나 아닌 것들 모두에게 공유公有되고, 나 아닌 모든 것들의 삶의 의미 역시 나와 공유된다. 뒤에서 언급하려고 하겠지만 결국은 언급되어질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 아닌 것 없이 나 홀로 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삶은 하나의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바로 여기 삶의 뿌리가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더 많이 소유하려 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고, 남을 짓밟으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내가 더 많이 소유하고, 내가 더 많이 커질수록, 나는 점점 존엄해지고, 행복해지고, 더욱 자유스러울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얼마나 커지든 결국 나이고, 나는 나 아닌 것들에 의존적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내가 나 아닌 것들과 공유하는 몫은 언제나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존엄이든, 나의 행복이든, 나의 자유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무엇을 통해 나를 키우려는 모든 노력은 헛수고일 뿐이다. 이런 삶이 삶의 뿌리를 모르는 삶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모습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나로부터 벗어나, 나와 나 아닌 모든 것들의 상호의존성을 이해하고, 전체적으로 사는 것이 삶다운 삶이요, 뿌리 있는 삶이다. 어진 사람은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을 서게 하며, 자신이 이루고자 하면 남을 이루게 한다.[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상호의존적이란 말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드러나 있는 것, 다시 말해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이, 삶이 하나라는 뜻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유가儒家의 모든 덕목들은 이런 관점에서 그 통일성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사람됨이 효순하고 우애 있으면서 손위를 넘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손위를 넘보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亂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된 사람은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서면 사람답게 사는 길도 드러난다. 효순과 우애는 남을 사랑함의 근본일진저. 나와 나 아닌 것 중에서 나 아닌 것이 결코 나 아닌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의 삶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이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간이다.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형장兄長의 우애를 통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와 부모 형제가 결코 남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삶의 뿌리를 찾는 첫걸음이다. 나와 남이 하나의 삶을 이루고 있음을 느낌이 곧 인仁이니, 인仁은 삶의 핵核이다. 더 이상 남이 아닌 남에게 느껴지는 사랑, 즉 인仁은 부모에게 나타나면 효孝요, 형제간에는 우애로, 친구간에는 믿음[信]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인仁이 드러나면, 그것은 곧 삶의 신비를 맛보는 것이 된다. 나와 나 아닌 것이 둘이면서 하나이고[二而一], 하나이면서 둘인[一而二] 삶의 신비 안에서는 남을 사랑함이 곧 나를 사랑함이 되고, 나를 사랑함이 곧 남을 사랑함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로 관통貫通하는 길이 곧 충서忠恕라고 할 수 있다. 충忠은 스스로 자신을 사랑함이요, 서恕는 남을 사랑함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은 충忠안에 이미 서恕가 있고, 마찬가지로 서恕안에 이미 충忠이 있다. 된 사람[君子]의 길은 마치 먼 곳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낮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과 같다. {시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아내와 자녀의 오순도순 함이 거문고와 비파의 어울림 같고, 형제간의 우애가 화기애애하니, 가정이 화목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기쁘리라." 삶의 뿌리는 우선 한 가정 안에서 화목한 가운데 식구끼리 하나됨을 맛보는 데서 찾아야 한다. 뿌리 없는 삶이 온전할 리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그 뿌리가 심하게 썩고 있어, 심지어는 뿌리가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삶은 나와 남, 나아가서 나와 나 아닌 것이 하나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뿌리는 가정에서부터 맛을 보며 찾아야 한다. 그리고, 가정의 뿌리는 남편과 아내에게 있다. 그런데, 그 뿌리마저 흔들리고 있다. 그것이 우리 삶의 현주소이다. 그렇다고 낙심은 말자.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 부부夫婦란 그야말로 남남이 만나 하나됨이니 결코 쉬운 관문關門일 리가 없다. 그러나, 그 관문을 지나 삶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 {중용中庸}은 말한다. 된 사람의 길은 부부夫婦에서 시작된다.[君子之道, 造端乎夫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