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 / 김종욱 1. 문제의 상황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 / 김종욱 1. 문제의 상황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지만, 그 봄을 알리는 새 소리가 숲에서는 들리지 않고, 눈 녹은 산 밑 샛강에서도 물고기는 더 이상 뛰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경작에 방해가 되는 해충을 없애기 위해 밭이나 숲에 마구 뿌린 살충제로 해충과 함께 익충도 죽자, 그것을 먹은 새들도 중독되어 멸종에 이르게 되었고, 아울러 지표면으로 스며든 독극물이 샛강을 오염시킴으로써 그곳에 살던 물고기도 떼죽음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은 환경 위기의 주원인을 공해에서 찾고 있는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여사의 그 유명한 저서 《침묵의 봄(Silent Spring)》의 분석 내용이다. 젊은 시절 이 책에 감명받은 A는 그후로 환경론자(environmentalist)가 되었다. 그런데 연구를 거듭할수록 A는 환경의 위기가 훨씬 더 광범위하고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업화에 따른 생산성의 향상과 인구의 폭발적 증가는 개인당 자연재의 소비량을 증대시켜 폐기물의 양을 증폭시켰다. 그리하여 산업 폐수와 가정 하수는 수질을 오염시키고, 농약의 남용과 산림의 벌채는 토양의 오염과 침식을 가져왔다. 더욱이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공장과 자동차에서 배출되는 아황산가스는 산성비를 내리게 하고, 일명 프레온 가스라고 알려진 염화불화탄소는 성층권의 오존층을 파괴하며, 특히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온실효과를 강화시켜 지구온난화를 가져와 각종 기상이변을 초래하였다. 이처럼 경제의 성장을 급속하게 계속 추구하는 이상, 환경의 파괴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제 A는 산업주의에 의거한 경제 개발을 억제하고 환경주의에 입각해 자연 보전을 추구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성장 우선의 경제론자(economist)인 B에게는, 이러한 주장은 여전히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후진국들에게는 전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환경의 보전보다는 당장의 배고픔을 극복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이 더 우선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국가와 인류가 부강해져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환경에도 눈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 또한 환경이 청결하고, 숲이 늘어나며, 인구의 증가가 감소하는 국가는 오히려 모두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들 아닌가? 그렇다면 생태계의 위기를 과장하여 선전하는 환경론자들의 주장은, 자연의 회복력과 인류의 적응력을 과소평가한 채 소란을 피우는 것에 불과하며, 특히 과학 기술의 진보를 통한 인류의 경제적 번영을 가로막고 자신들 조직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일종의 ‘생태학적 사기(eco-scam)’라고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이윤의 창출을 통해 욕망의 실현을 꿈꾸는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서의 인간을 중심에 놓는 것이 경제론자들인데, 이들과는 정반대인 환경론자의 진영에서도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찾아 볼 수 있다. 사실 물고기가 전멸할 정도로 강물이 오염되는 현상을 놓고 바람직하다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물고기 나름대로 고유한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강물의 오염이 인간에게 해악을 유발하기 때문인가? 이 중 후자가 인간중심주의적 환경론의 입장이다. 모든 가치는 인간에 의해 부여된 것이므로, 자연도 인간에 의해 파생된 외면적 가치만을 지닐 뿐이며, 이처럼 인간이 가치 체계의 중심에 서는 이상, 자연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도 오직 인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태 위기의 극복이나 환경의 보전에 있어서 인간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 것이지만, 그런 식으로 보호된 자연이 결국은 인간을 위한 안식처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자연을 단순히 이용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경제론자의 주장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문제를 노출하게 된다. 이와는 달리, 앞서의 물음에서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자연중심주의적(ecocentric) 환경론이다. 여기서는 자연이 그 자체의 존재 이유와 고유한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고 본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작동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적 전체이기 때문에, 그것의 일부에 불과한 인간이 총체적 유기체의 각 부분들을 자의적으로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인간의 이용을 위해서만 자연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발상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지만, 윤리적 자율성의 능력을 지니지 않은 자연 사물이 과연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그런데 경제적 개발로 인간의 삶의 질이 개선된 후에나 자연의 보호도 효과적으로 관리될 수 있다고 보는 경제론자이건, 그러한 경제적 성장의 한계와 폐해를 지적하고 자연의 보전을 우선시하는 환경론자이건, 또 그런 자연의 보전이 오직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서만 추진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인간중심주의적 환경론자이건, 단지 자연 그 자체의 생명력을 복원하기 위해 생태계의 보전을 주장하는 자연중심주의적 환경론자이건 상관 없이, 그들 주장 사이의 모든 갈등은 인간에 대해서만 자연을 평가하느냐 아니면 자연의 망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느냐 하는 시각차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따라서 여전히 중요한 문제는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서양의 역사 속에서 자연관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