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명상가 노장(老莊)의 자유 / 임채우 3. 잊음(忘我)의 순간

필부 2007. 11. 26. 11:06
 

바람의 명상가 노장(老莊)의 자유 / 임채우 3. 잊음(忘我)의 순간 바람이 휘감기듯 깃털이 나부끼듯 한다는 말은 지극히 자유스럽고 자연스럽게 살아감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현실 속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지,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삶일까? 한가지 비유를 들어보자. 지금은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예전에는 자전거가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이었다. 이미 수십 년 전 일이지만, 필자는 아직도 자전거를 처음으로 배울 때의 그 느낌을 잊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수년 전 자동차 운전을 배울 때보다 더 생생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껑충하고 불안정한 자전거의 두 바퀴에 몸을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는 참으로 쉽지 않았다. 온 몸은 경직되고, 특히 자전거가 쓰러질까 두려워 온 몸의 신경이 핸들에만 집중되었었다. 그래서 팔뚝은 천근만근을 지탱하듯 하고 두 손은 핸들을 꽉 움켜쥐었는데, 힘을 주면 줄수록 더욱더 자전거는 비틀거렸고 그럴수록 본능적으로 나의 두 손은 더 핸들을 움켜쥐는 악순환이 일어났다. 그러다가 서너 걸음이나 될까 핸들이 비틀거리다 이내 사정없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곤 했었다. 자전거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바로 이 핸들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이었다. 몸을 반듯이 세우고 눈은 정면을 바라본 채 핸들에 가볍게 손을 얹고서 몸 전체로 자전거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으로 죽 나아갈 때 자전거는 흔들리지 않았고, 나중에는 핸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서는 아주 편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이상의 경험은 자전거를 타본 사람이라면 아마 누구나 동감하는 내용일 것이라 생각한다. 노장의 자유도 바로 이와 유사하다. 그것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든 자유를 얻는 과정은 바로 내가 자전거를 배울 때 그 자전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과 같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것을 잊는다는 것이다. 사랑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더 멋진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옛사랑의 추억을 잊는 것이다. 장자에서 말하는 잊음(坐忘)이란 깜빡 잊어버림이나 단순한 망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잊음은 완전히 마음을 비운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고 자연스런 무심이나 무관심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는 마음을 재계해서(心齋) 고도의 정신 집중과 몰입을 통해 일어난다는 점에서 단순한 망각과 구별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깜빡 잊는 실수를 경험하곤 한다. 동무와 놀러나가는 아이에게 해가 지기 전에는 꼭 들어오라고 타일러도, 노는 데 정신이 팔린 아이는 걱정이 되어서 나온 어머니의 외침소리를 듣고는 겨우 세상이 어두워졌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돌아가신 할머님 사진을 우연히 발견하고 잘 모셔둔다고 하고서는 얼마 후 찾으려하니, 그만 잘 보관해둔 곳을 찾지 못해 온 집안을 다 뒤지고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에 우연히 국어대사전의 한쪽에 고이 끼여있는 옛 사진을 발견한다. 국그릇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깜빡 잊고 외출을 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온 집안이 연기로 가득차 있었다. 전화를 받느라 그만 달걀을 삶는다는 것이 감자를 삶고 말았다. 도가의 망아는 일시적이고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놀이에 빠진 어린아이나 기억을 상실한 병적인 상태와는 전연 다르다. 이는 고도의 정신 집중과 몰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벗어버린 채 道의 세계에 든 단계이다. 앞에서 본 〈제물론〉의 첫 구절에서 형체가 말라죽은 고목나무와 같고 마음이 불꺼진 재와 같은 스승의 모습을 보고 놀라 제자가 묻자, 스승이 ‘나는 나를 잃었다(吾喪我)’라고 대답한 장면도 이 망아의 상태를 형용한 말이다. 이를 도를 추구하는 방법론으로서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공자와 그의 수제자 안회의 대화 속에서이다. 안회가 저의 공부가 많이 나아졌습니다 라고 말하자 중니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 저는 인의(仁義)를 잊었습니다. 가하나 아직은 부족하다. 다른 날 다시 뵙고 말하였다. 저의 공부가 나아졌습니다. 무엇을 이름인가? 예악(禮樂)을 잊었습니다. 가하나 아직은 부족하다. 다른 날 다시 뵙고 말하였다. 저는 앉은 채로 다 잊었습니다(坐忘). 중니가 놀라 물었다. 무엇을 앉아서 잊었다고 이른 것인가? 안회가 말하였다. 나의 몸뚱이를 버리고 구별하고 따지려는 마음조차 버려서 천지와 완전히 동화됨을 앉아서 다 잊었다고 한 것입니다. 중니가 말하였다. 같으면 따로 좋아할 것이 없고 화(化)하면 일정하게 집착할 것이 없으니 과연 현명하구나. 나는 너의 뒤를 따르고 싶다.(《장자》, 〈대종사〉편) 이를 요약하면 좌망이란 자신의 주관 속에 자리잡고 있는 몸과 마음에 관한 모든 욕심과 구별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무차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먼저 ‘잊음’이란 의미부터 분석해보자. ‘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忘의 원래의 뜻은 잊음이지만, 도가의 철학체계에서 쓰이는 忘이란 단순한 무관심이나 망각이 아니다. 쉽게 말하긴 어렵지만 굳이 설명해보자면 각성은 되어있지만 마음의 의식이 자신의 의식을 제약하고 있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 주관과 객관의 경계를 망각하는 사태는 우연히 발생한다. 그러나 좌망에서처럼 주관이 자각되어 있는 상태에서 일부러 주객미분의 망각을 일으키고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면 자아의식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닦고 재계한 후 고도로 각성된 정신집중의 끝에서 좌망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많은 수련을 통해야 가능하다. 이 점에서 우연적인 신비체험이나 일시적인 무아지경의 상태와는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종종 주객의 구분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자아를 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한적한 강가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앉았노라면, 어느덧 천지가 고요해지고 주객이 합일되는 무아경에 드는 듯한 경험을 할 수가 있다. 영화를 보러간다고 하자. 영화가 시작된 처음에는 우리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인공과 그가 설정된 상황을 탐색하다가,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과의 거리가 없어져 버리고 자신을 망각한 채 한 시간 반 동안 주인공이 되어 대리 여행을 경험한다. 장자는 이런 피동적인 자아의 망각 상태를 말한 것은 아니다. 장자의 忘이란 개념은 마음을 비워 마음의 모든 작용이 멈추고 자아의식을 벗어버린 자유로운 상태이자 정신이 집중된 극치점에서 道와 합일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와 같은 忘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안팎의 모든 제약과 구속을 벗어나고 모든 차별적 의식을 벗어버려야 한다. 어떻게 벗어나는가? 그 벗어남은 처음에는 잡념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을 사용하지만 결국에는 역시 잊음(忘)이란 방식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완성된다. 발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것은 신발이 발에 알맞기 때문이요, 허리를 잊는 것은 띠가 허리에 잘 맞았기 때문이요, 앎이 옳고 그름을 따짐을 잊은 것은 마음에 꼭 맞기 때문이다.(《장자》, 〈달생편(達生編)〉) 신발이 발에 잘 맞으면 우리는 신발이란 존재도 발이란 존재도 모두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만일 우리의 마음속에서 계속 발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거나 허리를 계속 의식하고 있는 상태라면, 이는 뭔가 신발이 발에 맞지 않아서 불편한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잊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란 피아彼我가 자기 고집적으로 존재하며, 그것들이 서로를 제약하고 구속함으로써 대립·갈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장자는 언어와 언어가 담고있는 의미와의 관계를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필요 없다는 득어망전得魚忘筌의 비유로 설명한다. 즉 고기를 잡고 나면 고기잡는 통발은 더 이상 필요 없듯이, 의미를 파악하면 의미를 낚기 위한 통발인 언어는 잊혀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인 언어가 인식주관 속의 한켠에서 계속 생경하게 남아 있다면 이는 안 맞는 신발이 발을 조여서 발의 통증을 느끼면서 발이란 존재가 의식되고 있는 상태에 있는 것처럼, 언어와 의미가 서로를 제약하고 있는 상태이다. 언어가 담고있는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면, 즉 앎이 완성되는 순간 마치 잘 맞는 신발을 신은 듯 물고기가 강물 속에서 유유자적 자신의 존재를 잊듯 언어는 의경意境 속에서 스르르 풀어 없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