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얽힌 세상 / 이찬수 5 변화

필부 2007. 11. 1. 16:38
 

온통 얽힌 세상 - 불교적 관계론 / 이찬수 변화 이런 식으로 세상은 변한다. 나의 작은 경험을 다시 한 번 예로 들어보자. 한 15년쯤 전의 일이었다. 내가 교회 주일학교 고등부교사로 봉사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주일학교 행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한 학생이 느닷없이 내게 물어보았다. "선생님 진리가 뭐예요?" 내게 1-2초쯤 후에 멋진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응, 하나님이 곧 진리이지!" 그런데 그 학생은 다른 선생님도 비슷한 대답을 했다며, 별로 신통찮은 대답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집에 가는 길에 계속 생각해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멋진 표현이 하나 떠올랐다. '그래, 다음에 만나면 영원불변한 것이 진리라고 대답해주어야지' 생각했다. 나는 "주의 영원불변함 찬송합시다" 하는 찬송가 가사를 읊조리며 집으로 갔다. 그러나 그 이후 내게는 계속해서 의심이 들었다. '진리가 영원불변한 것은 분명히 맞지만, 인간이 영원불변하지 않은데 어떻게 진리를 알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어제도 다르고 오늘도 다르고 내일도 다를텐데, 내 모습도 생각도 아주 적게라도 끝없이 변화하는데, 어떻게 불변하는 것을 알고 말한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은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세상 만사는 모두 변한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은 언제나 변한다. 항상 새로운 인과 연이 부가된다. 그래서 무상(無常)이다. 무상이므로 사람은 영원히 젊을을 유지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무상이므로 동시에 사람은 태어나고 성장한다. 즉, 변화한다. 인생과 자연은 모두 변화하며, 따라서 무상하다. 이를 붓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불렀다. 일체가 무상하므로 '나'도 '자기'라는 존재도 무상하다. 불변하는 그 무엇은 없다. 이것을 붓다는 다시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했다. 모두가 인연에 따른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대체 '나'란 없다.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조건을 만나 그렇게 되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그렇게 하는 주체인 '나'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고, 더 많이 누리고, 더 높아지고, 더 오래 살려는 주체가 없으니, 인생은 그 자체로 괴로움(苦)이다. 석존은 이것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 불렀다. 일체는 무아이고 무상이며 그래서 괴로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