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 실재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 물리학적 관점 / 김성구 6. 맺는 말

필부 2007. 10. 9. 17:41
 

궁극적 실재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 물리학적 관점 / 김성구 <이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6. 맺는 말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니 ‘그것’을 ‘일심(一心)’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하겠지만 일심이라고 부르면 상주불멸의 실재인 줄 착각하게 된다. 일심은 상보적인 세계를 기술하는 파동함수에 대응하는 마음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바로 “일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으니 심생멸문과 심진여문이다”라는 말이다. 심생멸문과 심진여문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이 말은, 마치 우주가 상보적인 양으로 기술되듯이, 일심이 상보적인 마음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상보적인 물리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듯이 생멸심과 진여심이 동시에 작용하는 법은 없다. 현상계에서 ‘작용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상보적인 마음 하나가 어디론가 사라지기에 ‘작용하는 이 마음’을 상주불멸의 참 마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물질세계에서 현상계가 객관적인 실재일 수 없듯이 ‘작용하고 있는 이 마음’은 상주불멸의 영혼일 수 없다. 지금 현재 쓰고 있는 이 마음은 잠시 지어낸 마음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용하고 있는 이 마음을 있게 한 일심을 객관적 실재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파동함수로 기술되는 세계를 실재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중첩된 일심을 실재라고 할 수는 없다. 동시에 사랑하고 미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멸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마음과 변함없는 진여의 마음이 중첩된 일심을 실재라고는 할 수 없다. 일심이 실재라면 사람은 생멸의 세계를 만들어 냄과 동시에 생멸을 벗어나 진여의 경지에 있어야한다. 분별지로 볼 때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일심을 실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일심을 상주불멸의 실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불교는 아트만을 부정하는 것이다. 일심은 모든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중첩된 마음이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분별심이 만들어낸 말이다. 말로 표현하자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일심을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으로 나눈 것은 나눌 수없는 것을 둘로 나누자니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입자-파동의 이중성과 같이 일심이 그대로 진여심-생멸심의 이중성을 갖는 것이다. 입자와 파동이 둘이 아니고 하나인 그 무엇이 이중성을 갖듯이 진여심과 생멸심은 두 가지 다른 마음이 아니다. 하나의 마음이 그렇게 이중성으로 표현될 뿐이다. 결코 둘이 아닌 것이다. EPR실험에서 본 바와 같이 ‘전체로서의 하나’인 것이다. 일심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 벌써 ‘그것’을 ‘일심’과 ‘일심이라고 말하는 자’로 나눈 것이다.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었으니 일심이라고 말하는 자는 일심이라고 말하는 순간 벌써 자기 자신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다. 자기 언급을 한 이상 불완전성 정리가 말하는 대로 이성의 한계에 걸려 말로서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게 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궁극적 실재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궁극적 실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으나 일심은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삼라만상은 일심에서 나온다. 파동함수가 물리적 실재는 아니지만 모든 정보가 파동함수에 포함되어 있듯이 일심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마음도 물질도 일심에서 나온다. 모두 생멸심이 만들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