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있으면 불안증상도 치유되는가? / 장덕환 1

필부 2007. 7. 30. 11:56
 

믿음이 있으면 불안증상도 치유되는가? / 장덕환 1. 전개 ‘신앙인’하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모델이 있다. 그것은 항상 즐겁고 긍정적이고 활기차면서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사는 모습이다. 즉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곧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찰 정도로 감동적인 성령의 열매들을 떠올린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이 ‘불안’이나 ‘두려움’ 또는 ‘걱정’을 나타내면 우리는 쉽사리 “믿는 사람이 왜 그러느냐?”며 그런 표현들을 일축해 버리거나 한편으로 ‘믿음이 약한 것’을 은근히 비난하는 투로 받아넘긴다. 과연 믿음이 있으면 불안증을 주로 하는 신경증도 없어져야 하는 것인가? 바꾸어 말하면 불안, 두려움, 걱정에 시달리면 믿음이 약한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나타나는 불안스러운 감정들을 가지고 그 사람의 믿음의 깊이를 평가해도 되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정서적 고통 자체를 죄 또는 죄로 인한 벌로 여기고 있고 하나님을 믿으면 이러한 정서적 고통들에 시달리지 않게끔 반드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 사람들은 기도와 회개 그리고 성경공부만 열심히 하면 이와 같은 정서적 문제들이 모두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기도나 성경공부가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항상 또는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2. 신경증의 기본구조 정서적 질환(신경증)은 죄도 아니고 죄로 인한 벌도 아니다. 카렌 호오나이(Karen Horney, 1885-1952)는 신경증의 기본구조를 다음과 같이 관찰 연구하였다. 불안은 신경증의 기본을 이루는 정서이다. 이 불안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적대감, 무력감, 공포, 죄의식 등을 억압할 때 생겨나는 느낌이다. 이러한 적대감, 무력감, 공포, 죄의식 등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그녀는 신경증적인 사람들의 아동기 경험 중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적 환경들을 정리하였다. ① 어린 시절 애정결핍이 문제된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사랑 받고 원하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마음을 통해서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는 어른들이 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것인지 가식적인지를 정확하게 느낀다. 만일 어린이가 ‘자기는 충분히 사랑 받고 있음’을 느끼면 그 어린이는 외상적 경험들 (갑작스런 이유(離乳), 가끔 당하는 매질, 성 경험 등)을 큰 상처 없이 견디어 낸다. 어린이가 애정을 못 받는 이유는 부모 자신들이 신경증적 이라서 진정한 사랑을 자식에게 줄 능력이 없어서이다. 이런 부모들은 ‘따뜻함’이 본질적으로 결핍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위장하여 부모자신은 어린이에게 가장 이익이 되게끔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소위 이상적(理想的) 어머니들이 가지는 지나친 근심, 자기 희생적 태도는 나중에 굉장한 불안감을 갖게 하는 환경 조성의 기본적 요소가 된다. ② 적대감을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부모의 여러 행동 및 태도들 (어린이의 의지를 꺾는 행위들)은 다음과 같다. - 다른 어린이에 대한 편애 - 불공평한 질책 - 어떤 때는 지나치게 간섭했다가 어떤 때는 비난하는 투로 거부하기도 하는 등 어린아이에 대한 태도가 예측할 수 없이 수시로 변할 때. - 이행하지 않은 약속. - 어린이의 정당한 소망을 계속 일관성 있게 간섭하는 태도. (예 : 우정의 방해, 독창적인 생각을 비웃음, 예술, 체육 등 흥미를 추구할 때 무시함) ③ 질투 질투는 성인, 어린이 할 것 없이 무서운 증오의 근원이 된다. 형제간이거나, 어느 한쪽 부모에게나 질투는 중요한 역할을 해서 나중에 살아가는 중에 계속적인 영향을 끼친다. 요약해서 말하면 신경증을 초래하는 경쟁심과 애정의 결핍은 어린이의 과제가 아니라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신경증적 부모들이 문제가 된다. 이런 부모들은 대개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한 만족스런 정서적, 성적 관계가 없어서 어린이를 자기네 사랑의 대상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이에게 정작 필요한 애정의 욕구에는 태만하면서 어린이에게는 위협이나 연약함으로 동정을 유발시켜 강한 애착을 강요함으로써 정서적 부담을 주는 애정표현을 하게 된다. 어린이는 한 편 이러한 부모들에게 적대감과 같은 여러 가지 대항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적대감(무력감, 공포, 죄의식 등)은 쉽사리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는 그들의 적대감정을 주로 억압해야 한다. 그렇게 억압해야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① ‘나는 당신이 필요하므로 나의 적대감을 억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부모들은 아이를 보호해주고 순종하게 해서, 삶을 깨우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박탈한다. 그래서 결국 유아적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이때 부모는 의지의 대상일 수밖에 없으므로 적대감이 들더라도 표출해서는 안 된다. ② ‘나는 당신이 두렵기 때문에 적대감을 억제해야 한다.’ ③ ‘나는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적대감을 억제해야 한다.’ 진정한 애정이 없으면서 말로만 사랑, 희생 등을 강조하는 경우에 그러한 환경에 길들여짐으로 해서 얻는 보상을 잃지 않기 위하여 반항적이 되는 대신에 얻어지는 사랑과 공포라는 대체물에 집착하게 된다. 현대문화의 배경 속에서, 아이들이 적대감 또는 반항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한다면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아이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어린이가 부모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거나 표현하거나 혹은 부모가 제시한 규칙을 어긴다면 아동은 스스로 자신이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되어 있는 것이다. ④ ‘내가 적대감을 느낀다면 나는 나쁜 아이이기 때문에 이를 억제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들은 사로잡힌다. 특히 아이들이 성에 관한 환상 등에 젖어 있을 때 자기는 음란하고 비열하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또한 그런 이유들이 서로 결합하면서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적대감을 억압할 수밖에 없게되고 이렇게 억압되면 점차 그로 인하여 불안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유아기적 적대감과 불안반응은,  ㉠ 어린이는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행복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 악의 없는 장난스러운 조롱조차도 가혹한 거부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 다른 사람보다 쉽게 상처받고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등의 이유 때문에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불안으로 확대되어 나간다. 그래서 결국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외롭고 무기력하다는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감정 즉 다시 말해서 ‘학대와 기만, 공격, 모욕 그리고 배신과 질투로 가득 찬 세상에서 왜소하고 하찮고 무기력하고 버려지고 위험에 빠져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호오나이는 “근본적 불안(basic anxiety)”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이 근본적 불안 자체는 신경증이 아니며 단지 언제라도 신경증으로 발전되게 하는 토양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근본적 불안은 의식 밖으로 쉽게 들어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경증 상태에서 그 불안을 인식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 모든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근본적 불신은 ‘사람이란 보편적으로 좋아할 만한 것’ 이라는 인위적인 신념아래에 감추어지고, ㉡ 모든 사람에 대한 뿌리 깊은 경멸감은 언제나 남을 칭찬해 주려는 습관적 자세를 가지려는 노력에 의해 위장되어 있고, ㉢ 근본적 불안이 사람에 관련되어 있을 때 그것은 대상을 사람에서부터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즉 ‘나는 그 사람 때문에 불안한 것이 아니라 천둥 번개나, 정치적 사건, 병균, 음식 등의 위험 때문에 불안한 것으로 된다. 이렇게 숨어 있는 근본적 불안을 스스로 인식하기까지는 고도의 정신분석적 작업이 항상 필요한 것이다. 일상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근본적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4가지 방식을 쓰게 된다. ① 어떠한 형태이든 애정으로 안정감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이때의 좌우명은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다”이다. ② 복종함으로써 그 불안을 회피하려 한다. 특정한 전통적 견해에 복종하는 것, 종교적 의식에 복종하는 것, 강력한 몇몇 사람의 명령에 복종할 만한 대상이 없을 때는 자신을 혹사하여 남을 돕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럴 때 때로 사람들은 자기 행동에 불안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만 대개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행위는 오히려 자기희생이라는 이상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런 경우의 그들의 좌우명은 “내가 양보하면 나는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이다. ③ 힘을 통해 불안을 없이 하려 한다. 실제적인 힘, 성공, 소유물, 존경, 지적인 우월성을 얻음으로서 안전감을 얻고자 노력한다. 이 경우의 좌우명은, “만약 내가 힘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도 나에게 상처를 주지 못할 것이다”이다. ④ 도피하려한다. 이들은 실망이나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사람으로부터 정서적으로 격리되고자 노력한다 또한 자신의 정서적인 욕구를 완전히 막아버린다. 이렇게 격리해 버리는 자세는 자기자신에게도 적용시켜 자신의 문제마저 보려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것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정서적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외적, 내적 욕구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사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의 좌우명은, “만약 내가 물러서면 아무 것도 나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할 것이다”이다. 마음속에서 이런저런 갈등이 불안을 야기 시킬 동안 신경증은 일어난다. 그리고 일단 일어난 불안을 완화시키려는 노력이 서로 모순되게 방어적 경향을 유도하게 될 때 신경증은 발생한다. 지금까지 호오나이의 견해를 빌려서 신경증의 기본구조를 요약해 보았다. 호오나이가 지적하는 근본적 불안의 근원은 가정환경, 즉 어린이의 성장기 동안 부모의 태도에 일차적으로 달려있다고 한다. 이러한 과거의 심리적 상처가 현재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여러 가지 신경증적 증상으로 작용한다고 이해하면서 정신과 의사들은 그 사람이 현실에 충실히 직면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처럼 과거의 심리적 상처가 문제가 된다고 보았을 때 전혀 아무런 문제없이 성장하게 되는 인간이 과연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상처를 받고 자라는 것은 자연의 순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경증적 소인을 인간이 갖는다는 것 자체는 문제거리가 아니라 자연의 섭리 중 하나일 것이고, 그것 자체가 인간의 일부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면 누구나 정서적 고통에 적당히 시달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이더(O. Q. Hyder)는 마태복음 5장 45절의 말씀인,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를 인용하면서 어떤 병이든 간에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