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철학의 필요성 / 이병욱 4. 비판과 전망 <끝>

필부 2007. 7. 29. 11:49
 

비교철학의 필요성 / 이병욱 콘즈와 칼루파하나의 비교 4. 비판과 전망 이 둘이 세계적 대가로서 불교학방법론과 비교철학에 또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문제는 이 둘의 입장이 서로 다르다는 데 있다. 콘즈에 따르면 칼루파하나는 고전적 철학과 과학적 철학간의 구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일부분의 유사점을 확대해서 사이비 유사성을 말한 사람이 되고, 칼루파하나에 근거하면, 콘즈는 비교철학의 문 앞에 이르렀을 뿐 그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꼴이 된다. 이 차이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앞의 비교철학의 유형과 방법에서 설명한 내용에 따르면, 콘즈는 ‘유비적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유비적 방법이라는 것은 문화권을 고려해서 개별 사상을 비교하자는 것인데, 그것을 콘즈는 고전적 철학과 과학적 철학이라는 영역으로 바꾸어서 이해하고 있다. 필자는 콘즈의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 바이다. 개개의 사상에 부분적인 유사점에 휩쓸려서 큰 대세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 점에서 콘즈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도 종국에는 불교를 받아들이는 유럽인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예에 지나지 않는 점도 있다. 현재 불교철학을 동양에서 받아들이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고대철학체계에는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그게 그거라는 것이 콘즈의 속내이다. 그러면 칼루파하나의 주장은 어떠한가? 그의 주장은 앞의 구분법에 따르자면, ‘대비’에 속할 수도 있고, ‘대결’에 속할 수도 있다. 어차피 대비와 대결의 구분 자체가 애매모호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잘된 대비라면 이것은 대결이 될 것이고, 자신은 대결이라고 마음먹고 시작하였지만, 졸작이라면 결국 대비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루파하나의 주장은 유유히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이,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일 이외에는 현재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을 것같다. 그러나 붓다가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서 침묵을 의미하는 ‘무기(無記)’를 한 이유에 근거해서, 불교가 실용주의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는 학자들이 있고, 필자도 그런 해석에 동조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칼루파하나는 여러 가지 입장이 가능한 그런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 다른 이의 주장은 무시하고 자신의 견해만을 피력하고 있다. 이 점이 필자의 불만이다. 만약 칼루파하나의 주장대로, 붓다의 무기가 실용주의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라면, 다른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칼루파하나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칼루파하나의 공로도 매우 크다. 그의 주장을 미국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불교가 미국에 소개되어 어떻게 ‘미국화’되어 가는가 하는 점을 잘 나타내주는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중국인들은 ‘노장사상’이라는 안경을 끼고서 인도불교를 바라보았다. 물론 이는 오해이지만, 이제 그 누구도 이것을 오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중국인의 ‘독창적 이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칼루파하나의 견해도 미국식 격의불교의 한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고, 그리고 그 의의도 자못 큰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필자는 콘즈의 예에서 비교철학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고, 칼루파하나의 예에서 불교가 어떻게 미국화되어 가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콘즈의 예는 유럽식의 독자성과 적응성의 조화를 시도한 경우라고 평가할 수 있고, 칼루파하나의 예는 미국식 독자성과 적응성의 일치를 구성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두 사람 다 의미 있는 작업을 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면 이제 눈을 한국으로 돌려보자.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콘즈도 유럽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기능을 겸하고 있고, 칼루파하나의 작업은 미국의 명예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면, 이 둘 다 한국에서 그냥 무작정 수용할 수 없는 비교철학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인의 시각에서 콘즈와 같이 유비적 방법을 사용하여, 그것을 칼루파하나와 같이 대결의 구도로 몰고가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 내용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것이 이 땅에서 불교철학을 하는 이들이 풀어야 할 화두다. <끝> 이병욱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및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 강사. 논저서로는 〈천태지의 철학사상 연구〉 《천태사상 연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