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종교란 무엇인가 / 최준식
종교란 무엇인가 / 최준식 1. 들어가며 ― 종교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 우리는 정말로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종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한다. 종교에 대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태도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겠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는 그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들은 종교란 단어가 나오면 으레 따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종교란 그저 신이든 부처든 믿고 천당이나 극락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종교가 없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질문에 일생을 걸고 사투를 벌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하다 못해 작은 호기심조차 갖지 않는다. 나날이 먹고사는 것도 바쁜 세상에 무슨 내세를 이야기하고 신을 이야기하느냐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가운데 특히 기독교와 같은 유신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종교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종교를 잘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쉽사리 확신한다. 가령 기독교에서는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이 사람이 되어 수십 년을 살다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가 부활했다는 교리에 대해 그것이 문자 그대로 진리라고 믿는 신자들이 많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주장을 강하게 확신한다. 나는 이 교리의 진리 여부에 대해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과연 진리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진리가 그렇게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진리를 알고 있는 기독교인이 많은 이 세상은 왜 이리도 혼탁하고 인간 사회에는 대규모의 전쟁부터 해서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갈등이 많은 것일까? 뿐만 아니라 소위 진리를 터득했다고 믿어지는 소수의 성자들의 경우 그들은 그 진리를 깨닫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왜 이 유신론자들은 어찌 그렇게 쉽게 자신의 진리 획득 사실을 단정 내릴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믿는 교리의 모순에 대해 지적하면 그들은 곧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가령 ‘당신들이 믿는 것처럼 예수가 유일한 구세주라면 예수 이전에 태어난 사람과 예수 이후에 태어났되 자신의 과실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예수의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지적이 그런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신학적으로도 대단히 첨예한 문제라 존 힉(John Hick) 같은 저명한 신학자도 자신의 저서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God has many names)》(이찬수 역, 창, 1991)와 같은 책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논하고 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그들의 입장은 대단히 정형적이다. “당신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놀라운 하느님의 신비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종교는 그렇게 이성을 가지고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성적으로 따지지 않으면 그것은 도대체 사람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처음부터 그냥 믿어버리고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가? 이성이란 따질 데까지 따져보고 그 다음에 포기해야지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은 이성의 능력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다시 묻는다. 이런 내 질문에 다소 몰린다고 생각이 되면 느닷없이 “당신은 신을 믿는가?”라고 매우 원초적인 질문을 한다. 이것은 당신처럼 신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를 못하겠다는 발언으로 생각된다. 이 질문이 나오면 나는 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아진다. “당신 그 말 한번 잘했다. 당신은 ‘내가 신을 믿는다’는 말이 얼마나 복잡한 말인지 알고 하는 것인가? 우선 거기서 믿는 주체인 나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당신의 이성인가 감성인가 아니면 의지인가? 아니면 그것을 모두 합한 것인가? 아니 당신은 자기가 누구인지 확실히 아는가? 내가 알기론 자기를 확실히 아는 사람은 정말로 극소수에 불과한데 믿는 주체인 자기도 모르면서 무엇을 어떻게 믿는다는 말인가?”라고 치고 들어가는 게 내 반격의 첫 번째 단계이다. 그 다음의 내 질문도 만만치 않다. “당신은 신을 믿는다고 할 때 그 ‘신’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런 질문에 기독교인의 대답은 뻔하다. “하느(나)님은 (기독)성서에 계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곧 “성서에 나오는 신도 시대별로 다르고 예언자에 따라 다른데 어떤 신을 말하는가? 예수가 생각했던 신과 모세가 생각했던 신은 많이 다른데 어떤 신을 말하는가? 뿐만 아니라 유태교 초기의 신 개념―가령 변덕스러운 야훼의 모습―과 최근에 신학자들이 말하는 생태주의자들이 바라보는 신이나 페미니스트들이 바라보는 신은 거의 다른 신처럼 보이는데 당신이 믿는 신은 대체 어떤 신을 말하는 것인가?” 하고 되묻는다. 아울러 “‘믿는다’는 행위도 도대체 어떤 차원의 믿음을 말하는가? ‘사람은 죽는다’와 같은 사실을 믿는 아주 단순한 믿음부터 시작해서 수 없이 많은 차원이 있는데 어떤 차원을 말하는가?”라고 묻게 되면 대체로 우리들의 대화는 끝이 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종교를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신앙인들이 사실은 별 생각 없이 종교를 신봉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종교가 그렇게 간단한 주제라면 예수나 붓다 같은 인류 최고의 천재들이 그렇게 오랜 동안 골머리를 썩지는 않았을 게다. 물론 이런 식의 대화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불교 신자들과도 불교의 교리를 가지고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 불교는 교조적인 교리가 적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논쟁할만한 교리가 적을 뿐이지 불교 교리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엄청난 세월 동안 세계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발전해왔기 때문에 심지어 서로 상충되는 교리마저 발견된다. 가령 초기 교리인 무아론과 선불교의 진아론은 완전히 교리 내용이 상반되는 것 아닌가? 또 불교의 가장 핵심 교리라고 할 수 있는 이 무아론(無我論)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는 논쟁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무아론에 의하면 붓다는 ‘내가 없다’라고 설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없다면 불교의 사성제 중에 첫 번째 나오는 진리로 ‘인생은 괴롭다’고 할 때 도대체 누가 괴로워하는 것일까? 내가 없으면 괴로워할 주체도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불교의 최고 목표인 해탈을 달성했다고 했을 때 내가 없다면 도대체 누가 해탈을 한 것인가 하는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또 불교가 가장 대표적으로 주장하는 교리인 ‘참 나를 찾자’라고 할 때 내가 없는데 또 ‘참 나’는 어디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도 가능할 게다. 이렇듯 종교를 둘러싸고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차분히 따져보면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저 하나의 신념에 불과할 뿐 자신이 끊임없이 되묻고 숙고해서 완전히 체화된 그런 믿음들이 아니다. 그저 책에 씌어 있으니까 혹은 우리 교회 목사님이 얘기했으니까 진리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그저 되뇔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뒤로 하고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종교란 과연 정말로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왜 인류는 한 번도 종교를 떠난 적이 없을까? 왜 인류는 끊임없이 종교적인 질문을 할까? 또 지구상에는 왜 이렇게 많은 종교들이 있을까? 이 종교들은 매우 다른 교리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교리들은 외적으로 보기에 매우 다르게 보이는데 과연 각각이 다른 것일까? 중근동의 종교에서는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불교에서는 대체로 그런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렇게 상반된 교리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면 그 중 하나는 진리가 되고 다른 하나는 진리가 아니어야 하지 않은가? 가령 신이 있다면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종교는 거짓이 되어야 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되어야 한다. 도대체 종교란 무엇일까? 종교가 무엇이기에 사람을 죽음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일까? 초기에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을 잡아먹을 사자 앞에서도 찬송을 하면서 기쁨 속에 죽을 수 있었던 초인간적인 행위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을까? 신라의 혜초 스님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의 수많은 스님들이 진리를 찾겠다고 그 험한 인도로 가는 길을 갈 수 있게 만들었던 그 동인은 대체 무엇일까? 인도로 가는 길이란 먼저 간 수행자들의 해골을 이정표 삼아 가는 죽음과 삶의 중간 길인데 그 굳이 안 가도 되는 어려운 길을 왜 갔을까? 종교의 영역에서는 이렇듯 정치나 경제와 같이 일상적인 다른 삶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 발견된다. 이렇듯 종교에 관해서는 수많은 질문과 방담이 생겨난다. 이제 그런 종교를 이해하려 하는데 앞으로의 깊은 이해를 위해서 우선 종교를 학문적으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해해보기로 하자.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