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인들은 왜 불교에 관심을 갖는가? / 최종석 2. 서구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2)
서구인들은 왜 불교에 관심을 갖는가? / 최종석 2. 서구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 2) 새로운 세계관에 관한 요구 서구 사회는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서 자연을 인간 위주로 개발해 왔고, 그 결과 자연 환경은 파괴되어 가고, 생태계는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 또한 경제적인 풍요를 지향하는 물질문명의 구조는 인간성의 상실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 서구 사회의 미래에 대하여 젊은 세대들은 낙관적인 전망 대신에 깊은 회의를 지니고 있다. 이는 곧 인류의 미래는 지금까지의 세계관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위기 의식이 젊은 세대들 사이에 팽배해 가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의 곳곳에서는 환경 재앙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단 하루 사이에 20만 에이커(약 8만 정보, 1정보는 3,000평) 이상의 열대 우림이 파괴되고 있으며, 3만 6천 에이커(1만 4,000정보)의 땅이 사막화되어 불모지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천 3백만 톤의 유독성 화학물질이 공기중으로 방출되고, 그에 따른 오존층의 파괴는 날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토양의 오염, 수자원의 오염, 산성비, 지구의 온난화, 산림 파괴와 함께 하루에 130여 종에 이르는 생물이 멸종된다고 한다. 더구나 4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매일 굶어 죽어간다고 하니 매우 심각한 환경 재앙을 겪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상태로 진행되어 간다면 결국 지구는 50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진단마저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은 위기의식은 이성에 바탕을 둔 과학화와 산업화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 진화, 발전한다는 단선적인 역사관에 회의를 갖게 하였다. 또한 성장과 진보를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던 낙관주의적인 역사관에 따른 가치관이 근원적으로 흔들리게 된 것이다. 결국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이 심각한 상황의 원인을 주로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근대 서구 과학기술 문명에 돌리게 된다.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과학기술은 가치 중립적인 것인 만큼 과학 그 자체가 인류를 위기에 빠뜨린 것이 아니고, 그 과학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은 것이 위기의 원인이라는 점이다. 인간 욕망의 극대화를 지향하고 있는 기술문명이 인류를 절박한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면, 이러한 위기로부터 벗어나고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서구 사회는 21세기에 들어선 인류가 전환기에 처해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환경(environment)이란 말의 속뜻에는 계몽사상의 연장선에서 인간 중심적 관점을 갖고 있다. 그에 비하여 생태계(ecosystem)란 말은 탈인간 중심적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오늘날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환경에 대한 시각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한 전략이 숨겨져 있다. 환경이 훼손된 것은 인간 생존에 필요한 여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야기된 부작용이라고 본다. 이것은 인간이 중심적인 존재라는 가치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앞으로 더 나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환경의 중요성을 각성하게 하여, 환경 파괴적인 생산 및 소비를 지양하게 하며 환경 친화적인 기술과 산업을 개발해 가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환경을 인간을 위한 도구적 가치로 대상화하여, 인간의 생존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환경을 파괴시킨다면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오히려 인간의 생존이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윤리(ethics of anthropocentrism)에서는 인간만이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그 밖의 모든 존재들은 인간을 위한 도구적·수단적, 다시 말해서 외재적 가치만을 지닌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싱거(Singer) 같은 학자는 윤리공동체를 인간 사회에서 동물 사회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고통을 알고 감정을 가진 동물도 윤리적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동물 중심적 윤리(ethics of animocentrism)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은 물론 식물까지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만큼 존중되어야 하고 윤리적인 배려를 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생물 중심적 윤리학(ethics of bio-centrism)에서는 윤리공동체의 범위를 모든 생물에까지 확장시킨다. 여기에서 인간 중심적, 동물 중심적 윤리관은 존재양식 사이에 서로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 단절성을 인정하고 있으나 생물 중심적 윤리관은 인간과 동물과 식물 사이에 절대적 단절보다는 연속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생물 중심 윤리관에서도 생물계와 무생물계 사이의 불연속과 절대적 단절성이 전제되고 있다. 이처럼 존재양식 사이의 단절성과 비연속성을 전제로 하여 존재 사이를 질적으로, 절대적으로 구별해 보는 것은 서양의 세계관에 기인한다. 서구 문명의 역사는 곧 인간이 자연을 끝임 없이 정복하는 과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복의 논리를 기독교의 세계관이 뒷받침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너희는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지배하여라”(창세기 1장 28절)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를 신의 은총으로 여긴 것이다. 17∼18세기에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된 기술과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의 회복으로 이해하였으며, 근대의 과학적 진보는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잃었던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획득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기술과학의 발달은 인간이 신과의 약속을 저버림으로써 지은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세계관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기독교적 자연관과 근대의 데카르트, 베이컨 이래의 이분법적 자연 이해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식은 힘’이라고 외친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이 말한 지식이란 자연의 힘을 이용하고,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인간의 현실생활에 유용한 것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처럼 자연을 정복하고 대상화하는 서구의 자연관은 서구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기술과학을 발달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기술과학은 오늘날 인간을 기술과학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으며 그에 따른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초래하였다. 마찬가지로 무차별한 자연 개발에 따른 자연환경의 파괴와 생태계의 파괴 위기, 자원의 고갈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21세기의 문턱에 서있는 인류는 세계관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서구의 지식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다. 즉 서구의 세계관이 인류를 이처럼 절박한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면, 이러한 위기로부터 벗어나고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해결책이란 서구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대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며, 새로운 세계관으로의 전환이야말로 인류를 암울한 미래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자아와 세계를 연기(緣起)로 인식한다. 자연 만물의 원리나 본성이 연기(prat沖tyasamutpa?a)되었다는 것은 곧 ‘수많은 조건들(prat沖tya)이 함께(sam) 결합하여 일어난다(utpa?a)’는 상호 의존적 발생을 의미한다. 이렇게 일체 현상이 상호 의존성에 의해서 성립되었기에 어느 것 하나 영원 불변하는 고정된 것이 있을 수 없고(諸行無常), 연기된 것은 서로서로 존재하려고 힘을 들이고 있으며(一切皆苦), 그리고 독자적으로 생성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독립된 실체로서 독자적 동일성을 유지하며 존재하는 것이 없다(諸法無我)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존재들은 서로 상호 의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기본 교리인 연기론이다. 불교에서 바라보는 세계란 바로 나의 인식주체인 육근(六根)이 여섯 가지의 인식대상(六境)을 만나서 여섯 가지의 정신적 작용(六識)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이것을 일체(一切)라고 하는데 물질계와 정신계가 연기라는 원리에 의해서 통합되어 작용하는 하나의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연기론에서는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바라본다.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를 중생이라고 부른다. 중생의 개념이 초기 경전에서는 유정(有情) 즉 생명체를 의미하다가 대승경전인 《화엄경》에서는 생명현상이 없는 무정(無情), 즉 무생명체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중생은 붓다의 성품인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란 말은 붓다로 성불할 수 있는 범위가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으로, 다시 생명체에서 모든 무생명체로 확대되어 간다. 이것은 전 존재를 평등하게 보는 불교의 생태관의 일면이다. 여기에서 모든 중생이 하나이고 구별되지 않아야 한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불교적 생태윤리관을 보여주는 《범망경》의 구절을 보기로 한다. 모든 흙과 물은 모두 나의 옛 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모두 다 나의 진실한 본체이다. 그러기에 늘 방생하고 세세생생 생명을 받아 항상 머무는 법으로 다른 사람도 방생하게 해야 한다. 만일 세상 사람이 축생을 죽이려 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 마땅히 방법을 강구하여 보호하고 그 괴로움으로부터 풀어주어야 한다.1) 이러한 통찰은 세계와 내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物我同根)이라는 점을 알게 한다. 즉 모든 중생과 나는 서로 뗄 수 없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관계성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가 나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을 지혜라고 한다. 그리고 이 지혜의 실천을 자비라고 한다. 자비는 불교의 생태윤리의 기본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생태윤리는 생물 중심적 윤리를 넘어 생태 중심적 윤리(ethics of ecocentrism)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모든 개개의 존재는 존재 전체의 일부로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에 생태 중심적 윤리공동체는 바로 자연 전체이고 존재 전체와 일치하고 동일한 것이다. 불교의 자비심은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에게도, 식물뿐만 아니라 돌·물·흙에게도 미쳐야 한다. 이 자비의 생태윤리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야기된 지구환경의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생명체들이 공존 공생해야 하는 21세기의 시대적 가치로 받아들여져야 할 종교적 윤리라고 할 수 있다. 환경문제가 근원적으로 모든 생명체의 존재 위기로까지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그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따라서 인간 중심적 환경윤리가 생태 중심적 종교윤리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종교적 당위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서구 사회는 새로운 세계관을 요구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 우주와 사물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설정하려 한다. 이를 패러다임(Paradigm)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더 이상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서로 대상화되어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지배와 복종의 주종 관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태계의 위기가 인류에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 없이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유기체적 관계로의 발상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발상의 구체화 가능성을 서구의 학자들은 연기 논리의 상의상관성에서 찾고 있다. 더구나 생태주의자들은 서구적인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상호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불교적인 연계의 사고(inter-connectedness)로 변환할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따라서 저것도 없어지며, 이것이 생겨남에 따라 저것도 생겨나는 것이며, 이것이 없어지면 곧 저것도 없어지게 된다”(잡아함경 II 65)는 붓다의 가르침은 모든 사물이 절대적으로 홀로 생성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면서 존재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밝히고 있는데, 연기의 법칙은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생명 중심주의(Life-centrism), 더 나아가 불교적 생태 중심주의 사고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인격의 우주적 확산을 가능하게 한다고 서구인들은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온 우주가 서로 유기체적인 관련성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연기법적 세계관에 기초한 생활을 통하여 인간은 모든 생명체와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자비(compassion)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게 되었다. 미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패러다임인 불교의 연기법적 세계관을 서구인들은 깨닫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