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불교 그리고 해체철학 / 박경일 3. 니체의 불교에 대한 오해
니체와 불교 그리고 해체철학 / 박경일 3. 니체의 불교에 대한 오해 니체는 무엇보다도 불교적 특징을 “무(無) 가운데로의 동경”이라고 보았으며,14) 불교의 그것처럼 “순수하게 도덕적인 가치 정립”은 “어느 것이나 니힐리즘으로 끝난다.”15)고 쓰고 있다.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의 불교에 관한 중요한 견해들을 시사해준다. 14) Nietzsche, The Will to Power, Trs. Walter Kaufmann and R. J. Hollingdale, New York: Vintage, 1967, 1. The Will to Power로부터의 인용들은 “WP ___ 절(section)”의 형식으로 표기함. 15) WP, 19절. 불교에서는, ‘모든 욕망은, 온갖 욕정이나 피를 휘젓는 것은, 곧이어 행위가 된다’는 사상이 우세하며 …… 행위, 이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않으며, 행위는 생존 속에 고착해 있으나, 하지만 모든 생존은 어떠한 의미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도들이) 추구하는 것은 비존재(Nichtsein)에의 길이며, 이 때문에 그들은 욕정으로부터의 온갖 충동을 기피한다. ……불교의 이상(ideal) 가운데는 심지어 선악으로부터의 해방이 본질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거기에는 완전성의 본질과 합치하는, 도덕의 세련된 피안성이 고안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선한 행위도 역시, 단지 수단으로서만, 즉 모든 행위에서 해방되기 위한 그것으로서만, 잠깐 동안만 필요로 하게 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16) 16) WP, 155절. 불교는 철저히 무욕망·무행위·비존재·해방의 교의로서 인식되고 있다. 니체는 근원적으로 불교를 잘못 이해했으며 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들을 다수 남기고 있다. 프레니 미스트리에 의하면17) 니체는 불타가 공(sunyata)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기 때문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던 사실을 모르고, 불교의 공의 교의를 소극적으로 허무주의적이라고 잘못 이해했으며, 불교가 고통의 제거를 목표로 삼음으로써 삶, 생명의 거부가 그 목표가 되었다는 이유로 불교를 ‘소극적 허무주의’의 한 형태라고 비난했다. 17) Parkes, Graham.ibid, pp.255∼256. 미스트리에 의하면18) 니체는 고(苦, dukka)라는 단어가 불교에서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적절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불교가 고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잘못 이해했다. 이 단어는 기쁨, 심지어는 지복(至福)이라는 뜻까지 함축하기 때문에 단순히 ‘고통’으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불타의 초점은 ‘이기적인 갈망·자기통제의 결핍·증오·적의·슬픔·게으름·타성·음욕·걱정·의심, 그리고 형이상학적, 개인적 자아-실체(ego-substance)’ 등등 고의 ‘원인들’을 제거하는 데 두어진다. 비슷하게 니체는 또 갈애(tanha)를 근절하고자 하는 불교적 노력이 생명, 삶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오해했지만, 미스트리는 갈애가 그 자체로서 욕망이 아니고 ‘불멸 또는 절멸에 대한 욕망, 형이상학적 믿음들과 영혼의 이론들에 대한 욕망’으로 이루어진, 무지로부터 발생하는 ‘자아, 자만에 사로잡힌 갈망’이라고 주장했다. 18) Parkes, Graham. ibid, p.256.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에서 철저히 허무주의적인 “불교가 소리 없이 유럽 모든 곳에서 세력을 뻗어”19)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불교의 어떤 영향도 봉쇄하기를 원했다.20) 니체가 볼 때, 불타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병통치약인 니르바나(涅槃), 즉 모든 지상의 고통과 고뇌가 소멸되는 완전한 무욕망의 상태를 준다. 따라서 니체는 불교를 “문명의 종말과 피로를 위한 종교”21)라고 본다. 이 종교에서는 문화화된 그러나 피로한 이들이 “고통으로부터 니르바나라고 불리는 저 동양적 무(無)”로22) 은둔할 수 있다. 따라서 니체는 불교가 연약해진 현대의 문화인을 대표하는 《차라투스트라》의 ‘궁극적 인간(Ultimate Man)’을 사로잡아 이 궁극적 인간이 그의 ‘초인(Overman)’보다 더 선호되게 될 것을 우려했다.23) 19) WP, 239∼240절. 20) Morrison, Robert G. Nietzsche and Buddhism: A Study in Nihilism and Ironic Affinities, Oxford &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21. 21) Nietzsche,The Antichrist, Trs. R. J. Hollingdale, Harmondsworth, 1968, p.22. 22) Nietzsche,The Gay Science, trs. Walter Kaufmann, New York, 1974. 서문. 23) Morrison, ibid, p.24. 니체에 있어서 허무주의는 기존의 세계관과 이에 수반된 가치들에 대한 신념의 완전 상실에 뒤따르는 절망의 상태이다.24) 니체는 유럽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의 상실에 대한 반동으로 허무주의적 혼란이 유럽을 뒤덮을 것으로 내다보았으며, 이와 함께 교육을 받은 교양인들 간에서는 이 같은 재난에 대한 문명적 반응으로 ‘유럽적 불교’가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니체가 볼 때는 그것 역시 여전히 하나의 허무주의의 형태, ‘소극적 허무주의(passive nihilism)’이다.25) 24) Morrison, ibid, p.4. 25) Morrison, ibid, pp.4∼5. 모리슨에 의하면26) 소극적 허무주의란 보다 건강한 관점으로부터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가로막는 심리적인 질병의 눈을 통해서 판단되고 해석되는 세계에 대한 또 하나의 투사(projection)이다. 때문에 소극적 허무주의는 극복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행동적 허무주의(active nihilism)가 필요하다. 행동적 허무주의는 “정신의 증가된 힘의 표지”27) 우리의 종전의 종교적 목표들과 가치들과 이런 것들의 현대적 표현들과 관련하여 “파괴의 행동적 힘”28)이다. 행동적 허무주의의 결과는 허무주의 그 자체가 부정되고 인간이 해묵은 자기 기만을 벗어나서 세계와 자신을 신선한 눈으로 보다 깊은 이해를 가지고 보기 시작할 수 있는 경지인 ‘완전한 허무주의’이다. 26) Morrison, ibid, pp.22∼3. 27) WP, 22절. 28) WP, 23절. 그러나 불교는 소극적 허무주의의 한 형태29)이기 때문에 이 같은 허무주의의 부정에 대한 위협이었다. 불타는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의 무의미성을 극복하도록 도와주기 (그랬더라면 행동적 허무주의가 되었을 것이다)보다 단순히 그들이 어느 정도의 쾌활한 자세로 그 무의미에 적응하도록만 도와주는 종교를 창건했다. 니체에 의하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쾌활함·적정(寂靜)·욕망의 부재이며, 이 목표는 성취되었다.”30) 29) WP, 23절. 30) The Antichrist, p.21. 니체는 허무주의에 대한 유일한 수용 가능한 반응은 유럽적 불교의 창건(founding)이 아니라, 제반 가치들이 허구적인 초절적 세계나 존재에 기반을 두지 않고, 인간의 유일한 세계인 자연의 세계 속의 삶에 토대를 두는, 그런 인간과 존재에 대한 새로운 비전의 창조라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유럽적 형태의 불교의 출현 가능성은 이 같은 비전을 흐리게 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유럽적 불교는 여러 유형의 철학들이 가르쳐질 필요가 있는 것처럼 교육적인, 탐색적인 “망치”로서의 목적을 가질 수 있다고 니체는 생각했다.31) 31) Morrison, ibid, p.5.